고려시대 척준경의 일생에 관해 알고 싶어요.
고려시대 척준경의 일생에 관해 알고 싶어요. 비교적 베일에쌓여 있고 역사에서 언급이 잘 안되는데 어또한 사람인지 팩트와 기록 위주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재상으로 본관은 곡주 , 검교대장군 위공의 아들로 어려서 집이 가난해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무뢰배와 교유해 서리를 원했으나 되지 못했으며 뒤에 계림공의 부에 들어가 종자로 되었다가 추밀원 별가로 임명되었습니다.
1104년 평장사 임간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나가 공을 세워 천우위록사 참군사가 되었으며 1107년 중군병마록사로 윤관을 따라 동여진을 정벌할 때 석성, 영주 싸움에서 대승했고 길주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이 되었습니다.
이어 위위경직문하성에 임명, 인종 초 이부상서에 올라 참지정사를 거켜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1126년 2월 이자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했으나 왕의 권유로 뜻을 바꿔 자겸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위사공신의 호를 받고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뒤 정언 정지상이 범궐 사실을 탄핵하여 암타도에 귀양, 이듬해 국주에 이배되었습니다.
1144년 다시 조봉대부, 검교, 호부상서를 받게 되나 얼마 뒤 곡주에서 병사하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주리(州吏)주1의 집안으로 가난해서 학문을 닦지 못하고 서리(胥吏)주2가 되고자 했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아 무뢰배들과 교유하였다. 이후 계림공(鷄林公)주3의 종자로 있다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다.
1104년(숙종 9) 평장사(平章事) 임간(林幹)을 따라 동여진(東女眞) 정벌에 공을 세워 천우위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에 제수되었다.
1107년(예종 2) 중군병마녹사(中軍兵馬錄事)로 윤관(尹瓘)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종군해 석성(石城) · 영주(英州)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주4에 제수되고, 다시 길주(吉州)전투에서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주5이 되었다.
1117년 급사중(給事中)주7으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고,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주6를 역임하였다.
1119년 동북면병마사, 1122년 위위경 직문하성(衛尉卿直門下省)을 거쳐 1123년(인종 1)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이듬 해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開府儀同三司檢校司徒守司空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하지만 곧 관직에서 물러나 스스로 고향인 곡주로 돌아가자 인종이 이를 만류하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주8에 전보(轉補)하였다.
1126년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등의 거사를 계기로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 침범하여 불사르고 이들을 살해하였다.
이어 문하시랑 판병부사(門下侍郎判兵部事)가 되었으나, 왕의 밀지를 받은 최사전(崔思全)의 설득으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냈다. 그 공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에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太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戶部事兼西京留守使上柱國)이 되고, 처 황씨(黃氏)는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이 되었다.
이듬 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인종의 미움을 받다가 1127년에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功)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다.”라는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고, 이듬해 곡주로 이배되었다.
1130년에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 하여 처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었다.
1144년에 지난 날의 공으로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에 기용되었으나 곧 별세하였다. 1146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追復)주9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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