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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8.11

청자의 명맥은 언제 끊어졌나요?

고려시대에 청자가 유명했지만 조선에 들어와서는 청자가 아닌 백자가 조선의도자기를 대표하게되고 이토히로부미가 무덤에서 도굴한 청자를 고종에게 보여주자 어느곳의 물건이냐는 그의 말에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이 것이라고 했지만 고종은 우리나라에는 그런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청자의 존재가 잊혀졌는데 청자의 맥이 조선에서 언제 끊긴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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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초와 중기에는 서민층에서 조선청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에는 대중들이 백자를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조선초기에 비색청자와 상감청자가 일정하게 생산 이용된 것은 최근에야 비로소 알려졌습니다.

    조선청자는 잿빛도는 푸른색이 많기는 하지만 고려청자의 부드러운 푸른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일부 그릇은 고려청자보다 맑고 아름답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에는 ‘사옹원 사기는 대전(大殿)에는 백사기를 사용하고 동궁(東宮)은 청자기를 사용한다.’는 구절이 있어 궁중에서 왕은 백자를 쓰고 세자는 청자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청자보다 백자를 더 귀하게 보고 한급 위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기사입니다. 또한 세자는 미래권력이므로 해뜨는 동쪽에 거주해 동궁이라 하는것과 같이 젊고 어리다는 뜻에서 푸른색을 썼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청자의 생산지는 경기도 광주 부근 관요 가마로 한정됩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무렵부터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실전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는데 구한말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일본 총리가 고려청자를 고종황제에게 보여주자 고종은 이 도자기가 우리나라의 도자기가 아니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에서 청자는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된 것입니다.

    백자에게 밀려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대중매체에서도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 주인공이 조선에서 수입할 주요 교역물자중 하나로 지정해서 당시 왕이었던 명종이 구해주었다 정도로 언급됩니다. 그래도 이 세계관에서는 잉글랜드와의 무역품이 되었기에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실전될 일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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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때 청자는 유행에 뒤처지면서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분청사기를 거쳐 백제에게 자리를 내줬습니다.

    조선 후기 청자 제조의 기술은 거의 실전되고 대한제국 시대에 가서는 청자의 존재가 거의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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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어떠한 예술 사조도 다 성장기도 있고 쇠퇴기도 있습니다. 고려청자의 쇠퇴기는 1250년-1350년로서 그 기간은 1세기로 보나 몽골이 침입한 14세기 후반부터 시작한다면 실제로는 1세기 반이나 됩니다. 이른바 국가의 말기적인 증상이 미술에도 반영되어 청자기의 퇴조를 보이는데 중국 자체도 원(元)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전통적인 청자가 소멸되며 그러한 변화는 고려청자에도 미칩니다. 청자의 표면이 황록색조를 띠거나 비색(翡色)을 잃으면서 상감의 무늬도 산만하고 조잡해지며 같은 무늬를 반복 사용하는 등 무의미한 도안으로 바뀝니다. 기형은 매병(梅甁)이 줄어드는 대신 접시류가 늘고 대접은 안이 깊어지고 측면이 평평한 광구대(廣口臺), 바닥이 좁아진 변형된 매병 등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진사(辰砂)·화청자(畵靑磁) 같은 특수한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외에 철채자기(鐵彩磁器)가 등장하기도 하고 이것이 조선의 백자로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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