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초와 중기에는 서민층에서 조선청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에는 대중들이 백자를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조선초기에 비색청자와 상감청자가 일정하게 생산 이용된 것은 최근에야 비로소 알려졌습니다.
조선청자는 잿빛도는 푸른색이 많기는 하지만 고려청자의 부드러운 푸른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일부 그릇은 고려청자보다 맑고 아름답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에는 ‘사옹원 사기는 대전(大殿)에는 백사기를 사용하고 동궁(東宮)은 청자기를 사용한다.’는 구절이 있어 궁중에서 왕은 백자를 쓰고 세자는 청자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청자보다 백자를 더 귀하게 보고 한급 위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기사입니다. 또한 세자는 미래권력이므로 해뜨는 동쪽에 거주해 동궁이라 하는것과 같이 젊고 어리다는 뜻에서 푸른색을 썼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청자의 생산지는 경기도 광주 부근 관요 가마로 한정됩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무렵부터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실전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는데 구한말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일본 총리가 고려청자를 고종황제에게 보여주자 고종은 이 도자기가 우리나라의 도자기가 아니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에서 청자는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된 것입니다.
백자에게 밀려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대중매체에서도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 주인공이 조선에서 수입할 주요 교역물자중 하나로 지정해서 당시 왕이었던 명종이 구해주었다 정도로 언급됩니다. 그래도 이 세계관에서는 잉글랜드와의 무역품이 되었기에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실전될 일은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