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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7.13

독일의 대공위시대란 어떤 시대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1254년 독일은 대공위시대가 시작되었다라고 역사성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대공위란 말은 어떤 말을 가르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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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 역사상 국왕(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1254(또는 1256년)~1273년 이 시기를 말합니다.

    내부 혼란과 정치적 무질서가 극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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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 역사상 국왕(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1254년 ~ 1273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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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자신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2세의 말년은 또 다른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교회와의 끊임없는 충돌로 말년의 프리드리히 주변에는 적대적인 세력만이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1250년 12월에 고열의 장염으로 프리드리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아들 콘라트 4세도 1254년에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슈타우펜 왕조의 대가 끊기고 수많은 왕이 난립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대공위 시대(1254~1273)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대립 왕과 한 시기에 두 명의 왕이 선출되는 기현상이 일어난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물론 왕권의 약화였다. 그러나 대공위 시대에 분파 간의 선출에 의해 국왕을 뽑는 과정에서 이후 독일의 국왕 선출 방식인 선제후 제도가 서서히 자리 잡게 된 것은 또 다른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선제후 제도는 이미 1220년 기록에 "국왕의 선출에는 무엇보다도 마인츠 주교가, 그리고 둘째로는 트리어 주교, 셋째로는 쾰른의 주교가 참석해야 한다."고 적혀 있을 만큼 확립되어 있었다. 나머지 세 명에는 세속 제후가 포함되는데, 여기에 보헤미아 왕은 독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확고한 제도로서 선제후 제도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257년에 홀란드 공 빌헬름(1227~1256)의 사후에 치러진 선제후 회의를 통해서였다. 보헤미아 왕이 선제후의 지위를 확고하게 보장받은 것은 1289년이 되면서였다. 이러한 제도는 1338년에 렌에서 모인 선제후회에서 향후 국왕 선출에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을 결의하면서 보다 굳건한 제도로 자리를 잡아 가게 된다. 1356년에는 선제후 제도가 독일 국왕 선출 제도로서 확고한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확립은 왕권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선출된 국왕이 대소 귀족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국내의 평화와 질서를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선출된 국왕은 세습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을 위한 항구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실제로 1273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선제후 회의에서 새로이 독일 국왕으로 선출된 인물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 1세(1218~1291)였다. 그가 국왕에 선출될 수 있었던 이유로 알려진 것은 자신의 6명의 딸을 이용한 혼인 정책이었다. 국왕 선출이 있기 전 자신의 세 딸을 각각 팔츠, 브란덴부르크, 작센 선제후와 혼인시킬 것을 약속함으로써 독일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55세의 늙은 나이에 국왕으로 된 루돌프 1세는 자신의 국왕 선출에 반대한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1230~1278)가 빼앗아 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되찾아 자신의 두 아들에게 줌으로써 합스부르크 가의 영지를 넓혔다.

    출처 : 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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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공위'란 원래 로마 황제에게 선출되기 위한 각국의 후보자를 말합니다.

    이 대공위 시대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독일에서 지속된 정치적 혼란기로 독일 역사의 어두운 시대를 대변합니다. 이 시대에는 로마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어서 독일의 영토를 통치하는 여러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였습니다. 이러한 국가들을 대공위라고 했습니다. 대공위들은 자신의 영토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대공위들과 전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독일은 분열되고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공위시대가 종결된 것은 15세기 후반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면서 입니다.

    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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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공위 시대(Interregnum)는 독일 역사상 국왕(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기간(1254년 혹은 1256년 ~ 1273년)이다.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1256년 대립왕 빌렘이 죽자 정치 상황이 어지러워졌으며, 라인 지방의 제후는 영국왕 헨리 3세의 영향 아래 헨리의 동생 리처드를 추대하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왕 루이 9세의 지지 밑에 카스티야왕 알폰소 10세를 옹립하여, 제위(Kaiser)는 사실상 공백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Wahlkonferenz)에서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대공위시대는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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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공위 시대는 지금 으로 따지면 정부가 없었던 무정부 시대 라고 할 수 있었지요. 대공위 시대(Interregnum)는 독일 역사상 국왕(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기간(1254년 혹은 1256년 ~ 1273년)입니다.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1256년 대립왕 빌렘(Willem)이 죽자 정치 상황(Politische Situation)이 어지러워졌으며 독일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시기가 시작됩니다. 1254년부터 1272년까지 독일에는 왕이 없거나 있어도 명분밖에 없는 왕이 선출된 이후 왕좌가 빈 대공위시대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273년 루돌프 1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면서 대공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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