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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06.02

견훤은 왜 자기가 만든 후백제를 멸망시키려 한건가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어째서 고려의 왕건 밑으로 들어가서 본인이 세운 나라를 상대해서 싸우게 된것인가요?

견훤과 왕건은 라이벌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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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를 차지해 후백제라 칭하고, 궁예는 경기·황해·강원도 등 중부 지방을 장악해 후고구려라 하였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중부 지방을 공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왕건의 선조는 대대로 해상 무역에 종사하면서 부를 쌓아 상당한 세력을 키웠으며, 이 지방의 일부 해상 세력과 궁예 휘하의 왕건 세력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왕건의 세력은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을 장악해, 후백제가 중국과 통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고립시키고 구백제 세력의 분열을 노렸다. 금성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지금의 목포·무안 지역에서 나주까지인데,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교전이 치러졌다. 지금의 나주시 금성산(錦城山)의 산성 등이 당시의 격전지였다.


    경과 / 결과


    903년(효공왕 7)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군을 쳐서 후백제의 10여 개 군현을 빼앗고 금성을 나주로 고쳤다. 이 연대에 대해서는『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차이가 있다.


    910년견훤은 직접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이끌고 나주성을 공격하였다. 견훤의 나주성 공격은 서남해 지역의 토착세력이 왕건에게 투항한 것에 대한 보복조치였다. 견훤은 나주성을 10여일 동안 맹렬히 공격하였다. 궁예는 수군을 보내 후백제군의 배후를 기습하였고, 견훤은 나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후백제는 서남해지역에서 909∼911년 사이에 벌어진 몇 차례의 해전과 육전에서 왕건에게 거듭 패배하였으나, 914년 왕건이 돌아간 틈을 이용하여 다시 서남해 지역을 공략했다.


    궁예는 왕건을 다시 내려보내 왕건의 해군은 광주 염해현(鹽海縣)주 01)에서 견훤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배를 나포해 돌아왔다. 왕건은 정주에서 전함을 정비하고 알찬 종희(宗希)와 김언(金言)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500명을 거느리고 진격해 진도군을 빼앗고 고이도(皐夷島)까지 이르렀다. 이 때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왕건 군의 위용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고 한다.


    왕건이 돌아간 뒤 기근이 만연되어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나면서 서남해 지역은 다시 여러 난관에 봉착하였다. 후백제는 그 틈을 노려 재차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914년왕건의 시기적절한 구휼로 궁예 정권의 서남해 지역 통치는 안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궁예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뒤에도 나주는 고려의 영역으로서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왕건이 서남해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 호족(豪族)집단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주는 영산강이 바다와 합류되는 해안지역으로 상대포·구진포·영산포를 비롯한 중요한 포구들이 존재하였다. 나주의 호족들은 해로와 수로가 만나는 요충지에 위치한 지리점 이점을 이용하여 해상활동을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호족은 나주 오씨(吳氏), 영암 최씨(崔氏), 영광 전씨(前氏) 등이었다.


    오씨가문은 대대로 나주의 목포(영산포)에 살면서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나주 오씨는 그 세력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해상세력 출신이라는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연결될 수 있었다. 고려 태조의 비이자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 왕후(莊和王后)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영암 최씨 역시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후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 영암은 덕진포라는 좋은 항구를 가지고 있어 대중국교섭에 유리하였고, 이곳의 해상세력은 대외무역과 영산강 유역 토착사회의 역내교역을 주도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영암 최씨의 대표적 인물인 최지몽(崔知夢)은 어려서부터 여러 경서를 섭렵하였으며 천문과 점복에도 정통한 인물이었다. 18세 때 왕건을 만나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였고, 왕건은 그를 전쟁에 나갈 때마다 좌우에 두는 등 각별한 신임을 하였다.


    영광 전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개국공신(開國功臣) 반열에 오른 종회(宗會)가 있다. 종회는 왕건이 서남해지역을 공략할 때 많은 공을 세워 태조공신 운기장군(太祖功臣 雲騎將軍)이 되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35년 음력 3월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황위에서 축출 되었다가 그 해 6월에 고려 측과 사위 박영규 등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탈출했고 대리청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10월17일에 정식으로 즉위하였지만, 936년 9월8일에 견훤을 앞세운 왕건의 총공격으로 후백제는 패망하였습니다. 자기를 쫓아낸 아들 신검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왕건의 후백제 정벌에 앞장을 섰던 견훤은 후백제가 망한 다음날 사망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