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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9.13

아관파천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고종때 아관파천이 일어났다고 알고있는데요 아관파천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시는분 설명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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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1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입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 등지를 할양받았습니다. 그러나 1895년 5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들,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 · 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 ’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인한 조선 측에서는 러시아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 있던 명성황후 척족(戚族)주2 세력과 함께 유럽 · 미국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 · 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貞洞派)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러시아공사 베베르 역시 미국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 정책의 실시를 권유하였습니다.

    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었습니다. 그 후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매수 정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 · 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였다. 내각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개혁 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에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왕비 시해와 단발령 강행은 전국에 걸친 의병 봉기를 초래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관파천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관파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친일 내각에 대한 반발로 초래된 사건 입니다.

    1896년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임시 피신한 사건을 뜻하기도 합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래 전국적 반발이 초래된 것을 틈다 신변 위협을 느끼던 고종의 요청에 러시아 공관사관측이 호응 하였고, 이재순,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이 계획을 세웠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은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친일내각에 대한 반발로 초래된 사건입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래 전국적 반발이 초래된 것을 틈타 신변위협을 느끼던 고종의 요청에 러시아 공사관 측이 호응하였고 이재순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이 계획을 세웠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친일 내각에 대한 반발로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아관파천의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됨

    친일 내각은 고종의 권력을 축소하고, 일본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추진함

    고종은 친일 내각의 정책에 반발하고, 러시아의 보호를 받기로 결심함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친일 내각을 축출하고, 친러 내각을 구성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보호는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조선을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 9일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파천한 사건입니다. 아관이 러시아 공관을 뜻하는 한자어 입니다. 당시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커져가던 동시에 당시 러시아 공사는 공사관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병사를 서울로 데려 오게 됩니다. 당시 친러파인 이범진 등이 베베르와 공모하여 임금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국왕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이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이유 입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국왕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숨어들어갔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른다. ‘아관’ 즉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 즉 국왕이 피신해 갔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일국의 군주가 외국의 공관으로 피신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급한 지경에 처했더라도 결코 떳떳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고종의 입장에서는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묘책이었다.


    일본의 군사력에 의해 수립된 김홍집 친일정부에게 고종은 허수아비였으며 명성황후는 일본인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일본과 친일정부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한 고종은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고 외세를 빌어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춘생문 사건이 미국에 의존하여 시도한 대책이었다면, 아관파천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국권을 세우고자 했던 시도였다.


    1896년 2월 2일 고종은 이범진(李範晉)을 통해 베베르 후임으로 주한 공사에 임명된 슈페이에르(Alexi de Speyer)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는 의사가 담긴 밀지를 전달했다. 이 밀지에서 고종은 “단발령으로 야기된 의병활동을 빌미로 역도들이 나와 나의 아들을 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러시아공사관의 보호를 요청한다면서 러시아의 두 명의 공사들에게 신변 보호 및 군사적 수비를 요청했다. 당시 주중 대리대사의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청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조선에 파견되어 있던 베베르 전임 공사와 슈페이에르 후임 공사는 고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즉각적으로 러시아 군함을 인천에 파견했다. 2월 7일 고종은 이틀 후에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고 통보했으나, 2월 9일 이를 번복하고 러시아공사관에 병력을 증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슈페이에르는 인천에 정박해 있던 군함의 알렉세예프 제독에게 수병의 파견을 요청했고 2월 10일 밤에 러시아 수병 100명이 대포와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고종의 공사관 피신 요청에 대해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러시아의 군사전략이 태평양 함대 중심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2개월 전인 1895년 12월 1일 러시아 총제독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주재로 육군장관, 해군장관, 외무장관, 각국 참모총장이 참석한 동아시아문제 특별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해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야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와 같은 결정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마산포를 러시아 해군의 새로운 부동항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알렉세예프 제독이 1896년 1월 1일부로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군부와 알렉세예프 제독이 고종의 아관파천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쉽게 이해된다.


    마침내 2월 11일 아침 7시 30분에 여자 옷으로 변장한 고종과 왕세자를 실은 2대의 가마가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왔다. 대비와 세자비는 길을 달리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해 있는 덕수궁으로 옮겨갔다. 슈페이에르는 곧바로 각국 외교관을 초청하여 고종의 아관파천을 설명했고, 고종은 이날 정오에 각국 외교사절을 초대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경위를 설명했다. 그간의 정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각국 외교사절들은 고종의 설명에 공감의 뜻을 표명했고 이 자리에 참석한 일본 공사도 특별히 주목할 만한 행동을 보이지 못했다.

    출처 : 서울 근대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