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 지원군이 참전하고 가장 최초로 벌어진 전투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 지원군이 참전하고 가장 최초로 벌어진
전투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국군과 미군은 계속 북진하고 있었는데, 왜 중공군의 참전으로
대패를 하게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 지원군이 참전하고 가장 최초로 벌어진 전투는 1950년 10월 25일 청천강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 인민 지원군은 18개 사단 20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유엔군의 24개 사단 28만여 명의 병력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쳤습니다. 유엔군은 중국 인민 지원군의 의외의 참전에 당황하여, 청천강 방어선을 돌파당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군과 미군이 계속 북진하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참전으로 대패를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공군의 의외의 참전: 유엔군은 중국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하고, 방어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중공군의 압도적인 병력: 중공군은 유엔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기습 공격: 중공군은 밤을 이용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유엔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유엔군은 북진을 중단하고,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다면 추천 좋아요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한국 약칭 및 통칭 중공군은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와 조선인민군의 우군으로서 6.25 전쟁에 불법 개입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입니다. 1950년 10월 19일 한반도에 처음 침입한 이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총 병력 약 240만 명 이상 투입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전투 중 사상자는 전사자 18~20만 명을 포함해 약 36~40만 명,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한 사상자를 의미하는 비(非)전투 사상자 38~ 40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중공군이 강했던 이유는 아시다시피 인해전술로 불리는 병력숫자 였습니다. 휴전협정 직전의 북한 주둔 중국 인민지원군 총 병력은 야전부대 17개 군과 각종 지원부대를 합해 무려 120만 명까지 증강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일선 전투부대 외에도 후방 경비 및 보급을 담당하는 병력도 상당했습니다. 당시 전후방 전 병력을 합해 40~45만 명에 불과했던 북한군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사실상 공산군 측 전력의 70% 이상을 책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유엔군 총 병력 90만 중 한국군의 병력이 60만으로 다수였음을 보면, 6.25 전쟁 후반기의 중공군이 강했던 이유를 짐작해 볼수 있겠습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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