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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따라오
따라따라오23.05.24

정도전의 후손은 어떻게 살 수 있었나요?

이방원이 정도전이라는 정적을 제거하면서 그 가족들도 다 제거했다고 하는데. 정도전의 후손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살 수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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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를 설계한 설계자였으나 방원(芳遠)과의 권력투쟁에 희생되어 죽은 뒤에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정도전은 진(津)‧유(遊)‧영(泳 혹은 澹)‧담(湛)의 네 아들을 두었다.

    주) 澹은 정도전의 둘째동생 도존(道存)의 아들이고, 湛은 정도전의 막내동생 도복의 아들 淇를 태조살록에 오기한 것이다. 정도전은 津, 游, 泳의 세 아들을 두었다. 이러한 요류는 필자가 태조실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봉화정씨 세보를 통하여 바로 잡는다.그러나 둘째 아들 유(游)는 정도전이 피살되던 날 함께 피살되었고, 넷째 아들(湛)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정도존의 아들 澹은 집에서 自刎하였다.

    단 맏아들 진(津)은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수군(水軍)으로 충원되었다. 정도전의 아들들은 1411년(태종 11)에 서인(庶人)으로 폐해졌다가 1416년(태종 16)에 복권되어 진(津)은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영(泳)의 손자 정문형(鄭文炯)은

    주) 정문형은 영의 손자가 아니라 진(津)의 손자이다. 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은 용인현령을 지낸 래(來)이고, 둘째는 직산현감을 역임한 속(束) 이다. 정문형은 진의 차자 속의 장자이다. 따라서 여기 표현은 잘못이고, 정진의 손자, 또는 정도전의 증손, 또는 정속의 맏아들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세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조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진(津)의 아들 래(來)는 용인현령을 지내다가 서인(庶人)으로 폐해지자 평택으로 낙향했다. 평택에는 지금도 그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정도전의 두 동생 중 첫째 동생인 도복(道復)은 한성판윤으로 있다가 정도전이 제거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로 낙향했고, 둘째 동생인 도존(道存)은 그날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다.

    정도전은 역적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 내내 신원(伸寃)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증건 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 1865년(고종 2)에는 그의 봉작(封爵)을 회복해 주었고, 1870년(고종 7)에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編額)을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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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방원의 정도전 숙청은 애시당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 가족은 대부분 해를 입지 않았으며[33] 설사 노비 등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몇 년 후 대부분 복권되었다. 정도전은 삼형제의 맏이었는데 무인정사 당시 둘째 정도복은 한성판윤[34]으로 있었다가 정도전이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로 낙향했다. 셋째 정도존은 무인정사 당일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다. 정도전에게는 경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최습의 딸인 경숙택주 최씨라는 아내와 아들이 4명이 있었고 정진, 정영, 정유, 정담이라고 하지만 아들이 3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둘째, 셋째, 막내아들인 정영, 정유, 정담도 아버지, 삼촌과 함께 무인정사 때 이방원과 싸우다 전사한다. 살아남은 한 명의 아들은 바로 맏아들인 정진(鄭津, 1361~1427)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화를 면하였다. 이후 전라도 수군(水軍)의 일개 병사로 신분이 강등되어 수병 생활을 9년간 하게 되었으며[35] 아내 최씨 역시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이방원은 정진을 판나주목사로 임명하는 방법으로 복권시킨건 물론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시행했다. 태종이 정책 시행이야 그렇다 쳐도 왜 정적의 아들인 그를 아무 대가도 없이 복권시켰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적어도 태종은 그를 종친모해죄로 몰았으며 정적으로만 생각했지, 적어도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적으로 몰았더라면 삼족을 멸했을 텐데 그의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 태종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태종의 숙부인 이화도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단순한 집안 싸움이라고 일축했던 사례가 있었다. 묘하게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도 직접 복권시킨 전례가 있으며 애당초 본인부터가 정적에 관대한 면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36] 정도전의 장남 정진에 의하면 정도전은 스스로 시문을 쓰지 않고 입으로 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게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듣고 작성한 원고가 마음에 안 들면 원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진이 <삼봉집>을 간행할 때 아버지가 직접 저술한 원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정도전의 시문을 모아서 아버지의 문집을 편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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