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어떻게 운영되었나요
조선시대에서는 과거제도를 통해 벼슬길에 나갈수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시험을 본건가요 양반만 시험을 볼수 있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과거는 문과, 무과와 역과,의과, 음양과, 율과로 이루어진 잡과, 생원, 진사시가 있었으며 문과와 무과는 같이 실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증광시, 별시, 정시, 알성시 등의 비정기 시험이 있었습니다.
수공업자, 상인, 무당, 승려, 노비, 서얼을 제외하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수 있었으나 점차 가문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응시자가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가 되고 합격자들은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 문과에 합격해 벼슬에 오르는 것이 정상적인 길이었으나 생원, 진사 외에 일반 유생들에게도 문과의 수험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공무원처럼 임금님을 도와서 나라를 위해 일하던 수많은 관리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관리가 되는 길에는 과거, 음서, 천거가 있습니다. 과거는 시험을 봐서 관리가 되는 방법이며, 음서는 높은 지위를 가진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천거는 추천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이 중에서 과거제도가 대표적인 관리 선발 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개인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문과는 문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예비시험과 본시험이 있습니다. 예비시험으로 생원시와 진사시를 거쳤는데 이를 소과라고 부르고, 본시험인 문과를 대과라고 부릅니다. 문과는 유교경서의 해석, 문장을 짓는 능력, 나라의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시국관 등을 시험 보았습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선생 모두 문과시험을 치른 인물입니다.
무과는 무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시험과목으로 실기와 이론이 있었습니다. 실기과목에는 목전, 철전, 기사, 기창, 격구 등이 있습니다. 시험과목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였는데요. 예를들어 임진왜란 이후에 조총이 시험과목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론시험에서는 사서오경 중의 하나, 무경칠서 중의 하나, 경국대전 등을 구술하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즉 유교적 소양과 무예 둘 다 갖추어야 무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순신 장군도 무과시험을 통해 관리가 된 인물입니다.
잡과는 기술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역과는 외국어를 담당하는 통역관을 선발합니다. 율과는 법률을 담당하는 율관을 선발하는 시험입니다. 의과는 의술을 담당하는 의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도 의과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양과에서는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을 담당하는 관원을 선발하였습니다.
잡과는 각 과의 전공서적과 경서 및 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유생이라면 누구나 과거 합격을 소망했지만 이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정기 과거시험은 3년에 한번 시험을 보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나라에 기쁜일이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 비정기적으로 시험이 치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종 선발 인원이 매우 적었습니다. 문과는 최종시험에서 33명을 선발하였으며, 무과는 28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발표의식을 방방의식이라고 합니다. 방방의식에는 왕, 관료들은 물론 합격자의 친척들도 함께 참여하여 축하합니다. 인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합격증인 홍패를 주고나면, 왕이 급제자들에게 어사화와 술을 내려줍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3일 동안 과거 시험을 담당했던 관리, 선배, 친척을 방문하며 인사를 올렸는데 이를 삼일유가라고 합니다. 급제자는 단령을 입고, 복두에 어사화를 꽂고서 말위에 오릅니다. 행렬을 가장 앞에는 붉은색 옷을 입은 천동이 앞장서고 그 뒤에 붉은 색 천으로 싼 홍패를 든 사람들이 뒤따릅니다. 그 뒤를 북, 장구와 같은 악기를 들고 연주를 하는 악공들이 행진합니다. 삼일유가를 구경하는 여러 사람들이 보이죠? 이렇게 삼일유가 행사는 백성들에게 과거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도 했습니다.
자료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전주박물관 - 교육 자료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제도를 따라, 문과·무과·잡과로 크게 구분하였지만,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은 여전하여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지적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컸다. 따라서 천인(賤人)은 물론, 같은
양반이라도 서얼 출신은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신분상으로는 일반
서민인 양인(良人)과 양반만이
응시할 수 있었으나, 양인이 급제한
사례는 적어 대개 순수한 양반들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칙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 응시가 가능했습니다. 다만, 문과에서는 재가한 여자의 아들, 서얼의 응시는 금했습니다. 시험에는 문과, 무과, 잡과(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생원 등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과거 제도 중 문과 문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염치를 기르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노비 제도는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가? 노비 또한 하늘이 내린 백성인데 그처럼 대대로 천한일을 해서 되겠는가? 어느 집안은 노비가 많은 경우 수천, 수백명인데 한계를 둘 수 없는가?"
논술 문제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소과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누어 지는데, 문과가 가장 비중이 컸습니다. 정기시험에 해당하는 식년시는 일년에 3번, 비정기시험에 해당하는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했다고 합니다.
'경국대전'을 보면 법으로는 서민에 해당하는 양인과 양반이 할수 있었는데 양인이 합격한 사례는 드물었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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