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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4.02.05

홍경래에게 항복한 수령들은 왜 처벌이 이루어지지않았나요?

홍경래에게 항복했던 수령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합류했던 김익순만 제외하고는 수령들에게 별로 큰 처벌이 없었는데 왜 반란군에는 과도한 처벌을 하고 항복한 수령들에게는 관대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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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경래의 난(1811) 당시 반란군에 점령된 8개 고을(가산,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남창, 용천) 중 5개 고을 수령은 도주하고, 2개 고을의 수령은 자발적으로 항복했습니다. 특히 감삿갓의 할아버지 선천부사 김익순은 반란군에게 관아의 문을 활짝 열어 투항하고 반란군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산군수 정시만이 저항하다 반군에 참수되었습니다.

    반란이 진압되고 김익순을 참고하고 다른 수령들은 처벌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조정에서도 자기들의 실책이 있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머지 수령들도 반란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거나 진압군에 합류해 공을 세우는 식으로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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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 홍경래에게 투항한 수령들은 큰 벌을 받았습니다.

    김익순과 같은 경우에는 처형되기도 하는 등 하였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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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항복한 수령들 중 일부는 죄를 가볍게 받거나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거나, 반란 진압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조선 정부는 능력 있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항복한 수령들을 포섭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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