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부터 약 450년전인 영조 30년, 당시 김몽규 제주목사가 처음으로 옹중석(翁仲石)을 만들어 동문밖에 8기 서문밖에 4기 남문밖에 4기를 세웠다.
翁仲이란 사람의 이름으로 중국 진시황때 완옹중(碗翁仲)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남해 거인 역사로 키는 한질 석자나 되고 힘은 천명을 당하였다.
진시황제는 완옹중이를 시켜 흉노족등 북방 침략자를 토벌하여 격퇴시키도록 하였다.
옹중은 가는 곳마다 적을 밟아 죽였으므로 흉노족은 옹중을 보기만 하여도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그가 죽으니 진시황제는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그의 상을 구리로 만들어 아방궁 문 밖에 세워 두었다.
한편 흉노족은 옹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쳐들어 왔다.
멀리 아방궁쪽을 바라보니 옹중이 으젓하게 서 있지 않은가?
이를 바라본 흉노족은 옹중이 죽었다는 말이 헛소문이라 하며 그대로 도망갔다.
이때 진나라 사람들이 완옹중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를 지킨 수호신이라 하여 그의 상을 구리나 돌로 만들고 궁궐이나 관아 앞에 세우게 되었다.
제주에서 김몽규 목사가 중국의 옹중석을 제주에 세운뜻은 숙종.영조 연간에 제주에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려 죽고 전염병으로 죽은 수가 매우 많았다.
그중에는 원귀가 되어서 생인을 괴롭힌다 하므로 동·서·남문 밖에 옹중석을 만들어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예가 되어 정의현, 대정현에도 옹중석을 만들어 세웠다.
단지 현으로써 차등을 두고자 제주의 옹중석 보다는 작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