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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줄나비104
슬기로운줄나비10423.05.02

조선시대에 불교 말고 유학이 발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에 보면 유학(성리학)이 발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

이 유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와 어떠한 이유로 발달하기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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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가 지속되면서 불교의 폐단이 많이 생겼습니다.

    불교를 가장 강하게 비판한 것이 주자의 성리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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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2

    안녕하세요. 인문, 예술전문가 임지애 입니다.

    15세기 관료파 성리학은 왕권강화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성리학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고려부터였지요. 그런데 구귀족세력이 불교를 사상적 기반으로삼고 있고 원의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과거를 통해 어렵게 관직에 오른 신흥 사대부들은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그 이유를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한 구귀족 세력 때문이라 생각하여 불교에 사상적 기반을 둔 구귀족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성리학이며 14세기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공민왕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흥 사대부들과 힘을 합쳐 원의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 구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관학과 과거제도를 통해 신진 세력을 양성 등용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장악에 성공한 신흥 대부들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진, 숭유억불 정책을 표방하면서 국가의 모든 문물제도를 성리학이념에 따라 정비 백성의 생활의 원리로까지 성리학이 심화되도록 애썼고 이후 성리학은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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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학은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에게 불교를 대체할 정신적인 지주였고 고려 라는 불교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신적인 무기 였습니다. 그래서 무엇 보다도 숭유 억불 정책을 취했고 불교를 억압 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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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유학의 변천과정

    1. 조선 전기(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조선조에 이르러 유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정도전은 조선조 초창기에 있어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여 유학의 본령을 확립하였고 불교와 도교를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한 글(理諭心氣)을 썼다. 권근은 유학의 기본적인 이론을 도해(入學圖說)하여 사단(仁義禮智의 단)은 理의 근원인 性이 발한 것이어서 순선만 있고 악은 없는 것이요 七情은 氣의 근원인 心이 발한 것이어서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라고 하여 후일에 사단칠정론 전개에 선구가 되었다. 이상 정도전과 권근은 조선조 유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15세기 말에 김종직, 김굉필 등은 학술에 있어서 보다도 특히 성의율신(誠意律身)의 실천적인 명을 강조하였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한 조광조(1482-1519)는 신진 학자 정치가로서 도의적인 국가이념을 강력히 실현하기 위한 개혁을 과감하게 시행을 하였으며 시문을 위주로 하는 학적 태도를 배격하고 어디까지나 실천궁행의 선봉으로 인물본위로 30대의 소장학자들을 기용케 하였다.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부패한 구악을 일소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소장파의 급진사상은 일부 구정치인들의 반목질시를 받게 되어 결국 실패로 돌아가 38세를 일기로 최후를 마치었다. 이런 것을 한국에서는 사화(士禍)라고 하고 그 여폐는 당쟁을 낳아 조선조 500년을 통하여 불치의 고질이 되고 말았다.

    2. 조선중기-한국유학의 철학적 전개(16세기)

    16세기는 한국유학에 있어서 진지한 철학적 사색을 한 학자들이 배출한 시대이다. 유교가 국교로서 보급된 탓도 있지만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기를 꺼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연구에 몰두하는 기풍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학문자체로서는 약진의 기틀이 된 것이다. 서경덕(1489-1546)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여 이 기를 태허(太虛)라고 하였다. 만일 허가 기를 생한다면 기가 생하기 전의 허는 사물에 불과할 것이라 하여 기일원론이긴 하나 노자사상은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기가 모이고 흩어짐은 기틀이 스스로 그러함(機自爾)이요 기 이외의 다른 것이 있어서 기로 하여금 그렇게 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황(1501-1570)은 한국에 있어서 대표적인 주자학자요 가장 정밀한 사색을 한 위대한 유학자로서 그의 영향은 어느 학자보다도 크다. 이황에 의하면 사람의 性에 순수무악인 본연의 성과 선악부정(善惡不定)의 기질의 성을 구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단칠정이 같은 정이기는 하나 사단은 理가 발하여 순선무악한 것이요 칠정은 氣가 발하여 선도 악도 가능한 것이라고 하여 사단은 이가 발한 것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인의 한 사람인 奇大升은 이것은 너무나 이원적인 이론이라 하고 사단도 정인만큼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같은 기가 발하여 선한 것을 일러 사단이라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의문을 이황에게 제기하였다.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유학자는 이이(李珥)이다. 이이(1536-1584)는 23세에 천도에 대한 논문(천도책)으로 과거에 합격을 하였다. 이이는 이황의 이도 발하고 기도 발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원적인 이론에 반대하여 이는 발하는 것이 아니요 발하는 것은 기뿐이라고 한다. 즉 맹자가 말한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측은하다고 느끼는 것은 외물에 感하여 움직이는 것 즉 기가 발한 것이다. 기가 感함이 없이 이가 스스로 感하여 움직이는 법은 없다. 따라서 발하는 것은 외물에 感한 기이고 여기에 이가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고 이가 발한 것(理之發)이라든가 이가 발하고 기가 이에 따른다(理發而氣乘之)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청허한 기가 하나인 것은 이가 통하기 때문이요 이가 만가지로 다른 것은 기가 국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통기국(理通氣局)이다.

    3. 학파의 분열과 당쟁시기(16세기 중엽~17세기 중엽)

    유학이 성행함을 따라서 학풍과 학설의 차이는 학파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황이 영남(경상도)에 살았던 관계로 그의 학설을 계승한 학자들을 영남학파라고 불렀고 이이는 경기도 출신이었으며 그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들이 주로 경기 호서(충청도)에 많았던 관계로 이를 기호학파라고 했다. 이황이나 이이가 생존하였을 때는 이러한 학파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던 것이 정치적으로는 학파 문벌의 차이와 老少 新舊의 충돌로 말미암아 東人 西人의 두 黨으로 나뉘어졌다. 대체로 동인은 영남학파 소속의 학자가 주축이 되었고 서인은 기호학파와 관계를 가진 정치인이 주축이 되었다. 그후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다시 분열을 하였고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분파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16세기 중엽으로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백년은 국내외로 다난했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동서의 분당과 남북의 분파가 대립하며 광해의 폭정과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등을 겪었으며, 밖으로는 임진왜란(1592)을 비롯하여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 등 남과 북으로부터의 외침이 쉴사이 없이 계속되던 시기이었다. 율곡은 16세기 후반의 상황을 「국세의 미진함이 지극하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라가 무너지는 환란을 당하리라」 고 하여 정치 사회의 혼란을 경고하고 있다. 왜란과 호란등 거듭된 변방민족의 침입과 이에 따른 국토의 황폐화는 사회제도와 질서 전반에 걸친 붕괴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기존 사회제도의 변형은 그 근거를 이루는 시대이념인 유학사상에도 많은 문제를 던져주었다. 조선 전기의 통치이념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주자학의 체계는 비록 정통적인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지도이념으로서의 기능에는 상당한 동요를 보이고 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사회의 질서 확립을 위하여 禮學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국가 기강의 확립을 禮學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난후에 예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禮書의 간행도 전보다 점증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학파의 분열은 18세기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분파가 생겨났다. 人과 物의 性이 같은 것인가 또는 다른 것인가가 중심문제이었다. 이것을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라고 한다. 송시열의 문인인 권상하의 제자인 李柬은 같다고 주장을 하고 한원진은 다르다고 하여 논쟁이 벌어지자 1709년에서 1715년까지 7년간에 걸쳐 왕복 변론을 하였다. 사단칠정 다음 가는 대논쟁이었다. 인물성동이론을 주장한 한원진을 비롯하여 그를 지지한 학자들이 충청도인이었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호론(湖論)이라 하였고 인물성동이론을 주장한 이간은 충청도인이었으나 그를 동조한 학자들이 경기인이었던 관계로 그들의 주장을 낙론(洛論)이라고 했다. 호론은 성이 곧 기라는 입장에서 기질지성을 성으로 보는 만큼 인과 물의 성이 다르다고 한 것이요 낙론은 성이 곧 이라는 입장에서 본연지성을 성으로 보아 물의 성이 같다고 한 것이다. 主氣와 主理의 차이가 성을 달리 보게 된 것이다.

    4. 실학사상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즉 임진왜란을 전후로 싹이 터 영정조시대에 전성을 이루었던 학술사상을 말한다. 여말선초에 수입되어 조선건국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되어 그동안의 학술사상을 지배하여 오던 성리학은 철학적이며 논리적인 학문으로 흐른데 반하여 실학사상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면을 중시하며 우리의 당면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개선하고 실제적인 생활에 도움을 주는 이용후생의 색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학문이다. 이는 또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서학과 청조의 고증학 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의 학풍으로 확대되어 갔다. 다시 말하면 성리학은 이기나 성정등을 주제로 유학사상을 철학적으로 전개시킨 이론유학의 성격이라면 실학은 현실의 입장에서 실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경세치용지학을 위주로 하여 서양의 과학과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학까지도 연구한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인 것이다.

    이러한 실학사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조선중기 이후 사화 및 당쟁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적의 침입으로 정치기강이 문란하였고 경제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된 것에 대한 반성과, 둘째로는 성리학이 유학의 본래 정신과는 다르게 空理空談으로 흘러 절박한 현실에 도움이 되지 못한데 대한 불만, 그리고 셋째로는 청조의 고증학과 서학의 수입등으로 인한 영향 등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발생한 실학사상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에 관심으로 가지고 당시의 생활방식과 사회구조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조선후기사상사에서 주자학과 실학의 관계를 살펴보면 실학 제1기인(18세기 전반까지) 유형원, 이익, 안정복에서는 주자학적 문제와 실학적 관심이 모순없이 추구되었던 시기이고, 제2기(18세기 후반)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에 와서는 주자학의 이념에 대하여서 라기 보다는 주자학적 학풍에 대한 비판과 거부의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제3기(19세기 전반)의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에 이르러서는 주자학의 이론체계를 벗어난 독자적인 철학적 체계를 제시하게 된다.

    5. 척사위정론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양 열강과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침탈 위협의 증가와 천주교의 전파로 야기된 가치관의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서 다시 주자학적 이론이 발흥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전우(田愚)·이진상(李震相) 등이었다. 특히 이항로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응하여 철저한 주전론을 전개함으로써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선구가 되었으며, 이 문하에서 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김평묵(金平默) 등이 배출되어 척사위정론의 사조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1876년 개항까지의 조선조 유교는 쇄국양이론으로 구체화된 척사위정론, 곧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사조는 을사조약을 통한 일제의 실질적인 조선 강제점령 이후 의병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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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유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세종 때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이래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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