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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8

옛날에는 인분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과는 달리 변기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푸세식 화장실에서 인분이 쌓일만큼 쌓이면 똥퍼라는 직업이 똥을 퍼갔겠죠.

그렇게 퍼간 똥은 어떻게 처리가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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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풍족한듀공209
    풍족한듀공20923.08.28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똥으로 토지에 시비를 했다거나, 고려시대가 되면서 분전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 빠르게는 삼국시대인 7세기 이전부터, 최소한 늦어도 12세기 고려 명종(明宗) 이전에는 똥을 전답에 시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나, 그 똥이 인분인지, 가축분인지는 불분명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분이 농업생산의 비료로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은 중국이나 조선 모두 벼농사와 뽕나무 재배와 관계가 있으며, 10세기 무렵 한반도의 경우 인분이 밭농사의 시비용으로 사용된 반면, 송대의 경우 벼농사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16–17세기에는 조선에서도 향촌 지식인들에 의해 각종 농서와 잠서(蠶書)가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벼농사와 양잠(養蠶)이 확대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부터 벼농사나 뽕나무 농사에서 인분뇨의 역할은 양국이 동일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15세기 중엽의 <농사직설(農事直設)>이래 여러 농서를 통해 조선에서는 똥오줌을 재와 섞은 똥재 종류(糞灰, 尿灰, 熟糞)를 밑거름으로 널리 활용했음을, 17세기 초 고상안의 <농가월령(農家月令)> 이후, 특히 19세기 전반이 되면 오줌을 따로 모아 액상의 웃거름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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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거식뒷간은 전통적 뒷간의 일반적인 형태로 항아리를 묻고 그 안에 분뇨가 차면 퍼내는 형식입니다. 항아리안에 똥과 오줌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쌓이면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많이 생기며 거름으로써의 효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뒷간 입구에 오줌통을 따로 두어 똥과 오줌을 분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꺼낸 인분은 바로 쓰지 않고 밭 근처에 구덩이를 파 옮겨놓고 어느정도 지난 다음에 밭에 뿌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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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부분 비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6, 25사변 후에도 분뇨를 비료로 사용했습니다.당시는 화학비료가 없으므로 작물의 재배에 비료로 인분과 소변을 당시에 시골의 농민은 도시로와서 똥장군을 소구루마에 싣고 와서 도시의 분뇨를 전부 가져갔습니다. 1년내내 갖고가면은 가을에 도시에도 초가집이 많으므로 벼를 수확후에 초가집을 이를 짚을 갔다 주었습니다.그리고 기와집은 김장용 배추를 주었습니다. 당시는 모든 농민이 비료는 분뇨와 풀을 베어 퇴비로 해서 거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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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옛날에는 요즘과 같이 비료가 없었기 때문에 인분이 농사를 짓을 때 중요한 거름으로 이용되어 농작물 수확에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지금은 쓸모없지만 옛날에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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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옛날에는 인분을 퍼서 주로 비료로 사용했습니다. 인분은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질소, 인, 칼륨 등의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는 인분을 주로 밭이나 논에 직접 뿌려주었습니다.도그래서 채소를 깨끗이 씻지 않고 먹는 경우 회충에 많이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도시에서는 인분을 모아서 비료로 판매하거나, 퇴비를 만들어서 농사에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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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학 비료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인분이나 짐승의 똥으로 만든 비료를 주로 썼기 때문에 인분을 비료로 쓰는 어느 나라에서나 농민들에게 있어서 비료를 공급해 주는 장소였습니다. 한국에서 화학 비료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사람 똥이나 짐승의 똥으로 만든 비료를 주로 썼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있어서 비료를 공급해 주는 장소였습니다. 물론 그대로 쓰는 것은 아니고 몇달 묵은 똥을 걷어서 퇴비로 쓰는 것입니다다. 농민들에게 소중한 것이 비료이기 때문에 어느 구두쇠가 외출을 나갔을 때 오줌이나 똥이 나올 것 같아도 집에 갈 때까지 참았다가 반드시 집에 가서 눴다는 민담이 있기도 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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