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똥으로 토지에 시비를 했다거나, 고려시대가 되면서 분전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 빠르게는 삼국시대인 7세기 이전부터, 최소한 늦어도 12세기 고려 명종(明宗) 이전에는 똥을 전답에 시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나, 그 똥이 인분인지, 가축분인지는 불분명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분이 농업생산의 비료로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은 중국이나 조선 모두 벼농사와 뽕나무 재배와 관계가 있으며, 10세기 무렵 한반도의 경우 인분이 밭농사의 시비용으로 사용된 반면, 송대의 경우 벼농사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16–17세기에는 조선에서도 향촌 지식인들에 의해 각종 농서와 잠서(蠶書)가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벼농사와 양잠(養蠶)이 확대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부터 벼농사나 뽕나무 농사에서 인분뇨의 역할은 양국이 동일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15세기 중엽의 <농사직설(農事直設)>이래 여러 농서를 통해 조선에서는 똥오줌을 재와 섞은 똥재 종류(糞灰, 尿灰, 熟糞)를 밑거름으로 널리 활용했음을, 17세기 초 고상안의 <농가월령(農家月令)> 이후, 특히 19세기 전반이 되면 오줌을 따로 모아 액상의 웃거름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