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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10.01

홍건적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고려말 조선시대초기때 이성계장군이 많이 토벌했다고 알려진 홍건적 무리가 있는데요 홍건적은 어떻게 성장했다 없었졌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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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0.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성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을 홍건적이라고 합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홍두적·홍적이라고도 합니다.

    홍건적은 14세기 중반, 즉 원(元) 말기에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입니다. 이들 중 한 갈래는 북중국과 요동 일대를 거쳐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하였다고 합니다.

    홍건적의 침입과 그 격퇴는 고려-원 관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으로 종전의 고려-원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순식간에 껄끄러운 관계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홍건적이라는 공동의 적이 등장하자 고려는 원과의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원에 사신을 파견해 홍건적 격퇴를 알렸고, 원은 그에 대응하여 공로를 치하하는 사신을 보내오면서, 요동 일대의 홍건적 잔당을 협공할 것을 요청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려-원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는 오히려 공민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국왕을 세우려는 시도가 곧이어 전개되었습니다. 덕흥군 옹립사건, 혹은 공민왕 폐위사건이 그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공민왕에 대한 기황후의 개인적인 원한과 최유 등 부원배의 모략이 결합하여 일어났습니다. 결국 1364년(공민왕 13) 1월에 덕흥군과 최유가 이끈 1만 명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격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려에서는 최영과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등을 전장에 투입하여 맞섰습니다. 결국 원의 공민왕 폐위 조치는 군사적 대결 끝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고려에 대한 원 조정의 정치적 개입은 거의 종언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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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중국 각지에서 한족의 반란이 일었고 홍건적은 백련교와 미륵교를 믿는 한족 농민들을 중심으로 화북 지방의 허베이 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입니다.

    1355년 봉기해 나라 이름을 송 으로 정하고 한때 화북 지방의 여러 성으로 세력을 확대, 그러나 내부 분열을 겪었으며 원의 공격을 받아 약화됩니다.

    원의 군대에서 쫓긴 홍건적은 만주를 거쳐 고려로 밀려들어갔고, 1359년 12월 4만여명의 홍건적이 침입해 서경을 점령, 고려군의 반격으로 300여명만이 살아 돌아갔으며 1361년 10만여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홍건적이 침공해 개경이 함락되고 , 공민왕은 경상도 안동까지 피신,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고려군은 이성계, 정세운 등의 지휘 아래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되찾으며 이후 대규모의 홍건적 침공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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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대에 몽고족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입니다. 홍건족이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쓰고 다닌데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홍두적 또는 홍적이라고도 합니다. 이 반란은 1351년 백련교들이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를 쓰러뜨리고 한족 왕도인 명나라를 세우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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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 표를 했으므로 홍건적이라 하였으며 홍두적·홍적이라고도 한다. 홍건적은 비밀결사인 백련교를 기반으로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중국의 각지를 점령하였다.

    1355년에 한림아가 소명왕으로 추대되었고 국호를 송이라 한 후 중국 각지와 주변지역을 점거하여 홍건적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채식주의·근검절약·상호부조라는 종교적 계율을 지켜 농민들에게 환영받았으며 쉽게 원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었다.

    정치적체계가 명확치 않아 지휘세력간의 내분으로 결속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고 1366년 주원장이 소명왕을 죽임으로써 종결지어졌다. 이후 주원장은 원에 부정적인 농민들을 기반으로 명을 건국하였다.

    홍건적은 고려를 2번 침입했다. 첫번째는 1359년(공민왕 8) 12월에 있었다. 11월에 3,000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북변을 약탈하더니 12월에 모거경이 이끄는 4만 병력이 침입하여 의주·정주·인주·철주 등지를 함락시켰다. 이어서 서경을 함락시키고 용강·함종까지 진출했다. 이에 고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 이듬해 정월에 2만의 병력으로 서경을 공격하여 찾고, 다음달에 함종의 전투에서 2만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도망가는 적을 추격, 섬멸하여 침입한 적 가운데 수백 명만 돌아갔다. 2번째는 1361년 10월에 있었다.


    홍건적은 첫번째 침입 뒤 배를 타고 황해도·평안도의 연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 10월에 이르러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10여 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다. 이들은 서북면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의 방어선인 절령을 무너뜨리고 11월 하순에 개경을 점령했다. 이에 앞서 공민왕과 고려 정부는 남쪽으로 피난하여 12월 중순에 복주(지금의 안동)에 이르렀다. 홍건적은 2개월 정도 개경에 있으면서 갖은 만행을 저질렀고 각지의 고려 군민은 홍건적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공민왕은 복주에서 교서를 내려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물리치게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고려는 20만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여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 사유·관선생을 비롯한 홍건적을 10여 만 명이나 죽이고 물리쳤다. 그후 고려는 유탁(柳濯)을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로 삼아 재침에 대비했으나 큰 침입은 다시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가 입은 피해는 컸다. 먼저 개경을 비롯해 서북면 여러 지역이 많이 파괴되었고, 남방 지역도 왕의 파천과 군사 징발 등으로 사회가 혼란해졌다. 또 전공을 세운 무장세력이 득세하게 되어 김용(金鏞)의 반란이나 흥왕사의 변 등이 발생했다. 1356년 이래 공민왕이 적극 추진해오던 반원 개혁정치가 홍건적의 침입을 계기로 퇴색함에 따라 1361년에는 원의 기관인 정동행성이 다시 설치되고 다음해에는 관제가 원나라 간섭기의 것으로 복구되는 등의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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