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태헌 과학전문가입니다.
김유신의 적손인 윤중의 서손 암은 천성이 총민하고 방술의 학습을 좋아하였다. 젊어서 이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을 때, 틈을 타서 스승을 찾아가 음양가의 술법을 배웠는데, 한 모퉁이의 것을 들으면 미루어서 세 모퉁이의 것을 연술하였다. 스스로 둔갑입성법을 지어 그 스승에게 드리니 스승이 무연한 모습으로 오군(김암)의 명달이 이 정도에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하며 그후로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대력년간<당의 대종재위년간>에 귀국하여 '사천대박사'가 되었다.
라고 하여 "사천대(司天臺)"라는 천문관서의 존재에 관한 언급이 있다. 오늘날에는 천문대가 과학적 영역으로서의 천체현상의 이론탐구와 법칙성의 연구, 역법의 편찬과 반포 등을 업무의 대상으로 하지만, 당시의 천문대 성격을 띠고 있던 관서는 위에 언급한 업무와 함께 점성적(占星的)인 업무도 함께 관장하였다. 여기서 '점성적'이라는 말은 자연계의 현상 중에서 비규칙적인 현상(혜성의 출현 등)들을 하늘이 인간사회에 내리는 일종의 견고(譴告)라고 해석하여 국가나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짓는 것을 의미한다. 천문관서의 업무중에는 천명사상(天命思想) 혹은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에 의거한 비과학적인 업무도 있었기 때문에 방술과 음양학에 뛰어났던 김암(金巖)이 당(唐)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