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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가지나무
구르미가지나무23.07.10

기묘사화로 불리는 사건으로 조광조가 죽게되었는데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던것일까요?

중종14년 나뭇잎에 벌레들이 갉아먹은 자리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던 일이생기는데요. 이 기묘사화로 불리는 사건때문에 조광조가 죽음을 맞이하게되었는데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던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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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친위 쿠데타라고 합니다.

    중종의 결정으로 조광조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묘사화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조정 회의에서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종 단 한 명뿐입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은 물론이고 사화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곤도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는 데에는 반대했다. 이들은 조광조 일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조광조를 가장 강경하게 견제하던 세력들이었다고 합니다. 조광조가 처음에 사형을 면하고 능주로 귀양간 것도 남곤과 정광필이 결사적으로 반대한 덕이었습니다.
    심지어 훗날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사관은 "정광필이 가장 슬퍼하였고 남곤 또한 슬퍼했다." 하고 기록했습니다. 훗날 권신이 되는 심정, 이행 등도 조광조를 죽일 필요까진 없을 것이라며 사사에는 반대했고 정책적으로는 조광조의 반대파이지만 대쪽 같은 정승이었던 정광필은 "신은 임금을 살육의 길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저들은 조금도 삐뚤지 않은 사람들인데 어찌 죽음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언을 했고 아예 모가지까지 내어놓고 중종을 만류했지만, 중종은 기어코 추가죄목을 찾아내 조광조를 죽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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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19년 당시 조광조 등 신진사류의 혁신정치에 반발한 훈구파들에 의해 발생한 사화로 조선시대 4대 사화에 해당합니다.

    중종에 의해 등용돼 개혁정치를 펼치던 조광조는 38살때 대사헌의 벼슬에 올랐고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지치주의 정치를 실현하려 하나 이는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훈구세력과 대립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조광조는 중종반정 때 참가하지도 낳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사람들을 모두 가려내어 78명을 공신록에서 지워버렸고 이 사건은 훈구 대신들이 신진 사림파에 세력에게 된서리를 맞은 것으로 이에 남곤 등 당시 훈구 세력들은 조광조에게 앙심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남곤을 중심으로 한 훈구 세력들은 중종의 사랑을 받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움직여 희빈과 짜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이라는 글씨를 써서 그것을 벌레가 먹게 합니다. 그리고 이후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조(趙)자가 되는데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조광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주초위왕 사건으로 조광조 등에는 사형이 내려졌고 그 처자들은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모조리 빼앗는다는 판결이 내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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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극한 대립을 하던 중 훈구파에서 조광조를 주초의 난(조광조의 조자를 주초로 표기)을 일으켰다고 모함하여 피바람을 불게한 것이 기묘사화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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