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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한다람쥐166
깜찍한다람쥐16623.04.19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관계

제가 요즘 역사공부를 즐겨하는데

누군가는 이괄의 난으로 인해 당시 조선의 최정예병력이였던 이괄부대와 조선관군이 붙어 조선의 국방력이 제로에 가까웠고 그걸로 인해 정묘호란에 털리고 병자호란까지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는 그때당시 청나라군은 세계최강의 군대였고 조선의 국방력으로 어떻게 할수 없었고

이괄의 난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진 않았다

이렇게 보는 분들도 계신거 같은데 역사전문가님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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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네, 사실상 이괄의 난이 없었어도 청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한양까지 내려오는데 시일이 며칠 밖에 더 걸리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괄의 난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큰 영향은 주지 못했을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적은 영향은 주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ㄱ탓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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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괄의 난이 영향을 크게 미치기는 했습니다. 이괄은 당시 북방의 경계를 맡고 있었고

    노토부락과의 전투시에는 압도적으로 혁격한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조선의 정예병 1만 정도 였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조선의 정예병 1만이 내전으로

    거의 전멸되었고 방어를 하였던 조선군도 대략 1만 정도였으니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임진왜란 후여서 조선은 숙력된 병사들이 많이 있었고 선조는 이 병사들을 운용하여

    여진족들을 압박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당시 청(후금)의 군대가 워낙 강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홍이포까지

    손에 넣어 화력에서 밀렸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이괄의 군대가 보존되어 있고 임진왜란시

    만든 삼수군을 평지가 아닌 산지가 많은 조선 땅에서 방어선을 만들어 방어했다면

    병자호란과 같은 완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먼저 국사책에는 이렇게 써있다.

    "인조 때의 서인 정권은 광해군 때와는 달리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펴서 후금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의 군대가 이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 (1627 정묘호란)그러나 당시에는 후금의 군사력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화의를 맺고돌아갔다"

    국사책에는 위와 같이써있습니다.

    이제 저의설명

    정묘호란은 인조때일어났습니다 그 전 왕은 광해군 이였고 주 세력은 붕당중 북인이였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영창대군살해와 인목대비를 유폐시킴과 동시에 명을 섬기지않고 중립외교를 폈다는 점에서 붕당의 서인세력에 의해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서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친명배금 정책을폈다. 그러니까 청나라가 쳐들어온것이다. 한마디로 청나라를 미계의나라라고 욕하고 싫어하니까 쳐들어왔다가 돌아간거다.

    그리고 이때 와서 형제의 관계를 요구했다.

    병자호란:먼저 국사책에는 이렇게 써있다.

    "그 후, 국력이 더욱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구고, 조선을 압박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왔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청의 태종은 1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쳐들어왔다. (병자호랑 1636) 한양이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이제 저의설명

    명은 임진왜란 떄 조선에 원군을 오면서 국력이 많이 약해진 틈을타 여진이 명을치고 청을세웠다. 청은 힘이 더욱강성에져 병자호란때는 군신의 관계까지 요구하였다. 인조반정의 서인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펴자 청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와서 군신관계를 요구하고 간 사건이다.

    북벌운동의 내용:북벌운동이란 청은 치기위한 운동이다 국사책 내용을 보면 "두 차례의 호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정부나 백성 모두가 청에 대한 적대 감정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을 쳐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인데요 북벌론은 청에 인질로 잡혀있던 효종이 밀로 나가기 시작해 송시열,이완등이 합세했으나 청의 세력이 날로 막강해져서 나중에는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운동이 일어난 겁니다.

    북벌운동의 결과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청을 섬기는데서 끝났으며 실패한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것은 바로 나선정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