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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소보로크림빵
단팥소보로크림빵23.11.14

조선의 병자호란은 어떤 전쟁이었나요?

조선시대 청나라에 의해서 굴욕을 당하였던 전쟁이 병자호란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테 조선의 인조시대 병자호란은 어떠한 전쟁이고 어턴 의미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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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전쟁이으로 청나라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게된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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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 되는데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 이후 중강과 회령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 외에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을 요구 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했고,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들의 괴로움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로 개약하자 요청, 황금, 백금 1만냥, 전마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합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1636년 2월 용골대, 마부태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의 문상 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를 극간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됩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알고 민가의 말을 빼앗아 도주하는데 도망치던 중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은 비로소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으로,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의 칭호를 받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 이와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고, 그해 11월 심양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 최후 통첩을 보내나 조선에서 그들의 요구를 묵살,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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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침입했던 후금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조선의 친명배금 정책)로 1636년 청 태종이 직접 거병하여 조선에 침입합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도 없어서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고 청군은 거칠 것 없이 우리강산을 유린하였습니다. 후방에서 거병한 병사들은 청군에게 어이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강화도로 피신했던 왕실가족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인조는 스스로 삼전도로 나와 청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청황제는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부부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을 볼모로 청나라로 끌고갔습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균형을 잡고 있었으나 인조 때 이 균형추가 깨지면서 엄청난 난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지키고자 한 세력과 실리를 추구하자는 세력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으로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빈 강씨는 귀인 조소용의 모함으로 폐서인되어 사사당했으며 세 아들들은 제주도로 유배당했습니다. 첫째는 장독으로 죽고 둘째는 병사하였으며 셋째만 살아 효종 때 유배에서 풀려납니다. 인조는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그가 북벌론으로 유명한 효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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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16년 건국한 후금이 조선의 친명 배금 정책을 펴자 1627년 침입하였습니다.(정묘호란). 그러나 후금이 중국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쉽게 화의가 이루어지고 되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강요해 왔습니다. 조선에서는 최명길 등이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주화론)도 제기되었지만, 대부분의 서인들은 오랑캐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척화론, 주전론)이 우세해 후금의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후 청의 황제 태종(홍타이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와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결국 조선은 청의 군신 관계 강요를 받아들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습니다.(1636)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명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인 사대교린 정책이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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