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라는게 어떤 단체였나요???
안녕하세요. 옛날 한국사에서 나오던 일진회라고 하는 단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단체였나요?
뭔가 부정적인 단체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등이 세웠으나 진보회와 합동이후 동학세력이 주도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포퓰리즘 친일 민주화운동 단체. 일진회의 일은 日이 아닌 一이다.
애국계몽운동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분제 철폐를 추진한 면모도 있다.1894년 동학세력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종은 직접 주도하여 청에게 차병을 요청했고 일본이 끼어들어 같이 군사를 파견하였고 이후 조선에선 청일전쟁이 발발했다.[1]
동학파는 반란의 패배이후 외국혐오를 포기하고 외국의 '문명'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개종한 동학파는 러일전쟁에 일본을 지지했는데, 본 문서에 인용된 논문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엔 안중근 의사도 일본을 지지하였다.(그런 이유로 해당 행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
동학파는 1904년에 진보회를 조직하고 일진회와 합병을 발표하고 후자의 이름으로 단결했다. 일진회의 규모는 10만명 이상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대단한 규모였다. 매일신보라는 신문에는 일진회 회원들이 총 140,725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외로 삼남지역보다 이북지역에 일진회 회원수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농민, 무산자, 부농, 상인, 지방 사족 등 학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비기득권 세력이었다. 일진회의 회원들은 극단적인 단발사상을 가졌다. 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에 손 대는 행위 유교적 금기를 위반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일진회 회원들은 새로운 문명을 목표로 선정적인 발언으로 선동하였다.
초기 일진회의 집회는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엘리트측은 ',무식하고 문맹자'로 보인 참가자들이 모인 집회를 구경했는데 '촌스러운 사람들'이 읍내에 모여 '백성들의 개화, 그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국가의 보존'에 대해 연설하는 것을 보고 놀랬다. 그들은 과거에 외국인혐오성향의 무식한 이들이었으나 이제는 한국인 동포들에게 일본인과 친구가 되라 요청하고 있었다. 고종은 인기가 높아지는 진보회를 적대했다. 인기있는 진보회의 집회에 대해 1904년 9월에 참가자를 체포하고 지도자를 처형하라 명령했다. 10월엔 진보회에 총격을 허가하는 전보를 지방 관리들에게 보냈다.
일진회의 공식성명은 민주적이었다. 그들은 주권 개념을 포퓰리즘과 제국주의에 결합시켰다. 국민은 폭정 없이 자유와 복지를 지켜낸 '문명 제국'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민주주의 제국을 추구했다. 일진회가 옹호한 '문명 통치'엔 사정에 대한 대중적 통제가 포함됐다. 많은 지역에서 일진회와 회원들은 정부 측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일진회는 1904년부터 서울 상인들에게 자세 납부 거부를 촉구했다. 이후 일진회는 조직적인 운동을 벌였고 이 운동은 한국 북부지역에 제일 강력했다. 아이러니하게고 이런 운동은 일본의 경제장악에도 지장을 주었다. 일본은 황실 재산을 몰수했는데 이런 재정 통제 안정에도 지장을 준 것이다.
그래서 일본 측이 일진회와 측에서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진회가 세금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일부 일진회 회원에 의한 세금감세도 뒤집었다. 그리고 개혁정치에 일진회같은 대중세력의 개입을 비난하며 반대했다. 일진회의 포퓰리즘 동원을 진압 하였다. 일진회의 이용구는 이후 정합방론을 주장했다. 외교권은 일본에 위임하되 황실은 존치하고 내각 및 의회를 자치하는 국가형태였다. 합방청원서가 일제의 병행 단행이란 상황에 나온 기회주의라면 어느정도 일본이 수용 가능한 제안이어야하는데 정합방론은 오히려 일본에게 양보를 대폭 요구하였다. 당시 이용구의 지방자치 구상은 당시에 폭발적으로 분출된 하층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일정정도 수용하는 것이었다. 일진회에 참여한 민중에겐 양반지배체제에 해방되려는 욕구가 강하였다.
손병희는 원래 일진회에서 활동했으나 지도부들이 을사늑약에 찬성하자 이들과 연을 끊고 천도교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이용구와 그 추종자들은 독립해서 시천교를 차렸다. 그런데 교리상으로는 천도교와 시천교가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분리 후에도 시천교였다가 천도교로 전향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천도교였다가 손병희와 대판 싸우고 시천교로 가버리는[2]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식민지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처럼 양국이 동등한 관계로 합병되자는 주장이였다. 즉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대한제국의 황제를 겸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권에서 유럽식 동군연합은 생소한 제도였고, 정작 일제는 대한제국을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면서 사실상 일진회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어 버렸다. 이용구가 나중에 합방 청원하면서 쓴 표현으로는 '정합방(政合邦)'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일본 쪽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주장이었다.[3]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더이상 이용가치가 사라진 일진회는 일본에게 강제해산 당한다. 해산비 명목으로 15만 엔을 주었다고 하지만 신도들에게 실질적으로 돌아간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후 송병준의 경우는 나름 친일 경력을 발판삼아 재빨리 주류 사회로 발돋움한 것 같지만, 일진회원(=시천교도)들의 실질적 책임자이자 교주였던 이용구는 자기가 일제에 속고 배신당한 덕택에 2천만 한국인을 일본의 2류 국민으로 전락시켰다는 자괴감 속에 중병을 앓다가 1912년 일본 스마에서 사망한다. 이후 시천교는 송병준계와 김연국계가 갈등하다가, 김연국이 교주가 되어서 교도들을 싹 데리고 상제교(=천진교)로 독립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 일진회나 시천교라고 하는 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매우 복잡한 대중단체로 평가받는다.
재평가의 시작은 2005년부터이다. 그 이전엔 단순한 친일 매국단체라는 2005년 이후엔 대한제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대중적인 포퓰리즘 단체였으나 대한제국 말기에는 복잡한 이유로 친일 매국 단체로 타락했다는 평가이다.
문유미와 김종준의 박사학위 논문이 재평가의 시작이며 학계에서 이들 연구는 인정받는다.출처: 나무위키 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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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는 대한제국 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장선 친일단체 입니다.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등이 세웠으나 진보회와 합동 이후 동학세력이 주도한 대한제국 시기의 친일민주화운동 단체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4년 8월 송병준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송병준은 조선 안에 친일단체를 설립하라는 일본의 비밀명령을 받고 친일파 인사들과 접촉하며 세력을 모았다. 1904년 8월 18일 유신회를 조직한 후 8월 22일 일진회로 개명했다. 일진회의 강령은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고 내각을 교체하고 국가의 재정을 축소시켜 결국 주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일제의 조선지배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나타냈다. 일진회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1월 6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진회는 <국민신보>를 통한친일여론 조성, 고종의 양위 책동, 의병토벌 등 각종 매국행각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진회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집회결사엄금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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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는 1904년 8월에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들이 조직한 대표적인 친일적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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