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이 정치적 모함을 겪었던 이유는 뭔가요?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능력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모함으로 고초를 겪었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이 정치적인 모함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이순신이 그 전공으로 칭송받으며 향후 권력의 핵심으로 성장할까봐 원균을 필두로 그의 실책을 상소하고 폄훼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높아진 위상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왕처럼 행세한다고 모함했습니다.
2. 이에 선조는 자신이 중요했음에도 그러한 사실을 믿을만큼 성정이 약했으며 그로 인해 구국의 영웅이었음에도 그 자손들까지 보상하지 않는 옹졸함을 보였습니다.
왕이나 다른 신하들이나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사실상 선조나 정치인들은 왜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기 바쁜데,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싸울 때마다 이겼으므로 일종의 '시기심'에 근거해서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다.' 라는 생각에 기인하여 모함을 겪어 백의종군하고 그랬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81년 발포수군만호가 되었다가 전라남수영의 오동나무 베기를 거절하여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았고 1587년(선조 20년) 9월 여진족의 사전 기습 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으나 피해가 커서 북방사 이일의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하였으며 1598년 정읍현감 당시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 절충장군 만포진첨사 진도군수를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게 됩니다.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해전 등 연전연승하였으나 1592년 원균은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했으나 이순신이 단독으로 장계를 올려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이로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게 됩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통제를 받게 된 원균은 명령을 어기는 등 갈등이 심화됩니다. 조정에 명에 따르지 않고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다는 죄명으로 삼군수군통제사를 원균에게 넘기고 한성으로 압송됩니다. 사형은 면했으나 도원수 권율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칠전량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복직시켰고 12척의 배로 와선 130척을 대파시킨 그 유명한 명랑대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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