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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조선시대 천재 화가 신윤복은 어떻게 춘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인가요?

조선시대 천재 화가 신윤복은 어떻게 춘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인가요? 당시 조선은 엄청나게 닫혀있는 보수적인 사회였는데 그거 가능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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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춘화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한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김홍도 및 신윤복의 풍속화 가운데 춘화를 암시하는 작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대에 김홍도 및 신윤복의 풍속화풍으로 그려진 춘화가 유행한 것도 이 시기의 춘화 유행을 시사한다. 남녀의 애틋한 관계를 암시하는 에로틱한 장면은 김홍도의 풍속화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표현된 에로티시즘은 상류계층의 부조리를 풍자하는 내용과 연계되어 있다. 이를테면 양반이 시골아낙을 훔쳐 본다던가, 양반이 바위 뒤에 숨어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장면을 몰래 본다든가 한량이 우물가의 여인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모습 등을 통해서 성적 호기심과 더불어 사회적인 풍자도 곁들인 것이다. 그것은 풍속화가 지나치게 통속적인 것으로 빠지지 않게 제어하는 최소한의 윤리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 풍속화에서는 에로티시즘이 사회풍자 및 해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김홍도의 풍속화보다 훨씬 노골화된 표현이 등장하고 등장인물도 양반뿐만 아니라 기생, 스님, 양반가 여인들 등 다양해졌다.
    19세기에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풍에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낙관을 찍은 춘화인 『운우도첩雲雨圖帖』과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이 제작되었다. 이 화첩들은 후대의 작가가 이들의 화풍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두화첩을 보면, 성기를 노출하고 다양한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19세기 말에는 작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산쾌우첩巫山快遇圖』이 전하는데, 이는 신윤복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건곤일회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1930년 최우석이 그린 『운우도화첩雲雨圖畵帖』이 알려졌다. 이 작품은 전통 화풍에 일본 화풍을 조합한 특색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춘화를 제작해주고 많은 돈을 받는 등 상업적인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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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low but steady
    Slow but steady23.05.17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물론 조선은 보수적인 사회 였기에 춘화는 조선 초기 중기에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춘화는 서민들을 통해 유행 하기 시작 했고 18세기부터 일제 강점기 까지 크게 유행했으며, 조선 후기 풍속화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히 당대의 뛰어난 풍속화가들이 춘화를 제작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조선 시대 춘화는 단지 향락을 자극하는 도색화가 아니라 예술성 또한 뛰어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사례로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서명과 낙관이 찍힌 《춘화사계첩 (春 畵四季帖)》을 대표적인 춘화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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