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러일전쟁으로 막대한 민중의 피해가 나타난 가운데 당시에 파업이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에사회주의세력이 노동운동을 확대하고 혁명적 색채로 바꾸려 하자 이를 분리하려는 정부의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어용노조인데 사제가 이끌었는데 그 수가 점차 많아지고 해고에 반대하는 파업 등이 일어나 경찰의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여러 지역의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제와 노동자, 노동자가족은 차르에게 청원하러 겨울궁전으로 평화행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기마대와 총을 든 경찰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1000여명 이상이 죽고 2000여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당시 민중은 차르는 진실하고 차르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주변인들이 잘못됐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그 환상이 깨지고 차르 타도의 길로 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고 평가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