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에 많이 언급되던 충렬왕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요?
원원 간섭기에 많이 언급되던 충렬왕. 나름대로의 굳은 심지를 가지고 원에게 할말은 하였던 왕이라는 것만 기억이 납니다. 이 충렬왕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제 25대 왕(재위 1274~1308).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을 2차례에 걸쳐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원의 지나친 간섭과 왕비의 죽음 등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왕위를 선위했으나 7개월 만에 복위해야 했다. 음주 가무와 사냥으로 소일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재위 34년 만인 1308년 죽었다.
초명 심(諶) ·춘(冲). 휘(諱) 거(昛). 원종(元宗)의 맏아들.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나라 세조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구비(舊妃)는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 및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이다. 1260년(원종 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1년(원종 12) 6월 원나라에 가서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 1274년 원종이 죽은 뒤 고려에 돌아와 그 해 8월 왕위에 올랐다.
10월 원(元)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으나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으며, 1281년(충렬왕 7)에도 김방경(金方慶) 등이 원나라 병사와 더불어 제2차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1290년(충렬왕 16)에는 합단(合丹)의 내침으로 12월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1292년(충렬왕 18) 1월에 환도하였다.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과 왕비의 죽음 등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1298년(충렬왕 24)에 세자(충선왕)에게 선위(禪位)한 뒤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나 원나라에 갔는데,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충선왕의 妃)의 무고로 충선왕이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등의 음모사건이 발생하자 선위 7개월 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은 그 후 음주 가무와 사냥으로 소일,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다가 1308년(충렬왕 34) 7월, 재위 34년 만에 죽었다. 원나라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훈고사장(訓古詞章)의 학을 경사(經史)로 전향시키는 등의 치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 때문에 자주성을 잃기도 하였다. 능은 경릉(慶陵:개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렬왕 [忠烈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렬왕은 고려 25대 왕입니다.
재위 기간 원의 일본 원정에 2차례 참여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늘날 일본과 관계가 안 좋을때..
실패를 했더라도 지석적으로 일본 뤈정에 참여했다는 갓..
그것이.가장 큰 업적이.아니었을까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60년(원종 1) 태자에 책봉되고,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 풍속인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어 고려인들이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1274년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치러진 대륙국가와의 왕실 혼인으로,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양국의 우호관계를 배경으로 역대 권신들에 억눌려 오던 왕실의 지위는 회복, 강화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 왕실에는 몽고의 풍속 · 언어 등이 퍼지기도 하였습니다.
즉위년 10월 일본 정벌이 원 세조의 강요로 실행되어 1차로 여원연합군이 합포(合浦)에서 출정하였습니다.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 정벌에는 실패하였습니다. 1281년에 감행된 2차정벌도 폭풍 때문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원나라는 이후에도 두 번 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벌준비를 강요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였습니다. 1293년 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東征)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 세조가 죽음으로써 동정은 끝이 났습니다.
1290년 원나라를 괴롭히던 내안(乃顔)의 잔여세력인 합단(合丹)이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왔습니다. 왕은 원나라에 원군파병과 천도 허가를 요청하고 강화로 피란하였습니다. 합단은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楊根) · 원주를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연기까지 침입하였습니다.
이 싸움은 원충갑(元沖甲) · 한희유(韓希愈) 등의 활약과 원병의 도움으로 1년 반 만에 끝났습니다. 이 밖에도 야인(野人)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물리쳐 국운을 보존하였습니다.
원나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은 국토 보존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290년에는 최탄(崔坦)이 몽고에 반부(叛附)함으로써 설치된 동녕로(東寧路)를 원 세조에게 직접 요청하여 돌려받고,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삼별초(三別抄)의 최후근거지로 몽골에 함락되어 다루가치 총관부[達魯花赤總管府]가 설치되었던 탐라를 1294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은 행정에 더 직접적으로 해악을 미쳤습니다. 관제(官制)가 지나치게 분수에 넘친다며 고치기를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쳤습니다. 육부(六部)도 전리사(典理司) · 군부사(軍簿司) · 판도사(版圖司) · 전법사(典法司)로 폐합,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조(祖) · 종(宗) 대신에 왕(王)으로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忠’자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벌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어 내정을 간섭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 밖에 몽골 직제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직도 있었습니다. 몽골식 기병이 야간순찰을 도는 순마소(巡馬所),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좇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禿魯花)로 갔다가 순번제로 숙위(宿衛)의 임무를 맡은 홀치[忽赤, 忽只], 몽고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문관(通文官) 등이 그것입니다. 관직은 아니지만 공주를 따라온 겁령구(怯怜口: 私屬人) 등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속된 관원들은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사전(賜田)의 특권을 누리면서 당대 세력가들로 부상하였습니다. 부역에 시달려 도망친 양민을 모아 농장(農莊)을 경영하면서 조세를 가로채고 주현(州縣)의 부세(賦稅)를 좀먹는 등 양민을 괴롭혔습니다.
또, 특수임무를 띤 별감(別監)이 자주 주현에 파견됨으로써 지방민의 피해를 가중시켰습니다. 특히, 왕 자신이 세자나 공주가 말릴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이로 인해 매를 관리하는 응방의 적폐는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1298년 왕의 총애를 믿고 세도를 부리던 궁인 무비(無比)가 그 당류와 함께 세자(뒤의 충선왕)에게 주살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으며, 원나라에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駙馬上柱國逸壽王)의 호를 받았습니다.
이 해 8월에는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후부터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게다가 왕유소(王惟紹) · 송린(宋璘) 등이 부자간을 이간질하면서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왕전(瑞興侯 王琠)에게 개가시켜 왕위를 잇도록 책동하는 음모에 동조하였습니다. 1305년에는 이를 성사시키려고 원나라로 직접 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의 옹립에 공을 세워 원나라 조정에서 위치가 높아짐에 따라 왕유소 일당은 처형되었고 왕도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실권은 세자에게 빼앗기고 1308년에 죽으니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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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의 가장 큰 업적은 부왕 원종이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받아낸 불개토풍의 약속과 고려의 존속을 구체적으로 확약받고 온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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