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성 왕씨는 고려 474년간의 국성으로 번영한 가문이었지만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새로 건국하면서 조선의 안정에 걸림돌이 되는 방해물로 간주되었다. 개국 초기에 왕씨들을 섬으로 옮겼다가 시간이 약간 지나자 다시 섬에서 나와도 된다며, 재주있는 왕씨들은 벼슬도 하게 해준다고 했다. 태조 3년 1월 16일 그러나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쟁이에게 태조와 공양왕 중 누구 운세가 더 좋은지, 왕씨들 중에서는 누가 제일 운세가 좋은지 물어보는 역모 행위를 하자 고려 왕씨 일부를 거제도로 다시 옮겼다.
왕씨 몰살을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태조도 마침내 왕씨를 제거하기로 결정했고, 4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도에 있던 왕씨 일족들을 강화 나루에서 익사시켰다. 4월 17일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 왕요 일가가 교살당했고 4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모아놓았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제거 대상자는 《개성 왕씨 대동보》에서는 공양왕을 포함해 약 150여 명이라 전하며, 이 사건을 연구한 재미 한국사학자인 유진 박 펜실베니아대 교수가 참조한 사료인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혼기(魂記)>와 이 <초혼기> -명부-에 기록된 규모도 삼척에서 공양군 왕요 포함 8명,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111명, 강화도에서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 도합 135명으로 역시나 비슷한 규모이다.
이후 지속적으로 감시와 색출이 법제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왕씨들은 지방에서 쥐죽은듯 숨어지냈다. 태종 13년 공주에서 일어난 왕거을오미 사건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탄압을 중단시키기 이전까지 개성 왕씨들은 약 20여년간 숨죽여 지내다가 태종과 세종을 거쳐 점차 처우가 개선되어 문종~세조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선 지배층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