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도 군대는 의무적으로 가야 했나요?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병역의 의무를 다 해야 하는데요
조선시대 때도 이와 같이 모든 남자들은 군대를 가야 했나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문물제도를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중앙군제도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이군육위와 궤를 같이하는 십위체제(十衛體制)였다. 당시는 건국에 공로가 있던 공신 일가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집권국가로서의 왕권은 지극히 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겪은 뒤, 1400년(정종 2)에 조정은 모든 사병을 해체하고 중앙의 삼군부(三軍府)에 귀속시켰다. 이로써 정치적 안정을 찾는 동시에 군사제도도 정비되기 시작하여 세조 때에는 오위도총부 지휘하의 오위제도로 법제화하였다.
이와 같은 오위제는 무과(武科)에 의해 선발된 장병과 신분상의 특전으로 편입되는 특수병들, 그리고 농민이 의무 병역으로 중앙에서 근무하는 정병(正兵) 등 셋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갑사(甲士)와 정병으로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건국 초기의 지방군은 대체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의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육수군은 다시 시위부대인 시위패(侍衛牌)와 남방 해안지대에 설치되었던 영진군(營鎭軍)으로 나누어지며, 기선군은 연해민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또한 영과 진이 주로 해안지대의 방어를 위하여 설치됨으로써 내륙지방의 방어가 허술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내륙지방에는 잡색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북방에는 고려 말기 이래의 익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 뒤 세조 때 북방의 익군체제를 전국화하여 진관체제(鎭管體制)가 확립되면서 지방의 잡다한 병종도 의무 군역인 정병으로 모두 일원화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 때 완성된 오위와 진관체제는 잡다한 신분으로 구성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모든 군인은 군역을 부과함으로써 충당하였다. 즉,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모든 장정은 징발의 대상자이건, 무과에 급제하여 편입되건, 신분적인 특전에 의하여 편입되건 간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군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국민개병제였으며, 그 주류는 역시 농민이었다.
그러나 모든 농민이 현역으로 복무할 경우 토지 경작에 노동력 등이 부족하여 농업경제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장정 모두를 징발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체가 건강하고 비교적 부유한 자는 호수(戶首) 혹은 정병이 되어 서울에 근무하거나 지방 요새지에 파견하였으며, 여기서 제외된 자는 봉족이라 하여 정병에 대한 재정적인 부담을 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이미 고려시대 군반제의 양호제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으나, 고려시대와 다른 점은 군인전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포(布)를 바쳐 돕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호수와 봉족체제는 1394년(태조 3) 마병의 경우에 5정(丁)이 1군을, 보졸의 경우에 3정이 1군을 내도록 할 것을 왕에게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403년(태종 4)에는 과거 인정(人丁)으로 파악되던 봉족제를 호 단위로 파악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전결도 대상이 되었다.
이를 갑사의 예에서 보면 전(田) 3결 이하에 봉족 2호, 4∼5결에 1호를 주고, 전 6결 이상자에게는 봉족을 주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 이미 병종별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전결의 다소가 일정하지 않았다. 가령 시위패는 전 5결이면 봉족을 주지 않았고, 기선군은 갑사와 같았으며, 같은 농민이라도 수성군(守城軍)은 봉족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2, 3결 이하를 소지한 자에게 봉족을 지급하였으며, 자연호를 단위로 한 이유는 군역에 대한 징발과 재정적인 보조 기준을 인정 단위보다 전결 단위에 두었던 때문인 것 같다.
이러한 자연호를 단위로 한 봉족체제는 혈연을 중심으로 3정을 단위로 하여 정군 1명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정치가 안정되고 지배 계층이 형성되면서 신분적 분화가 촉진되고, 또한 농장이 확대되면서 토지 소유관계가 질적·양적으로 분화되어 빈부의 차가 격심해짐에 따라 군역 부과의 기준을 토지에서 구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관리들이나 지방 세력가들은 실역(實役)을 회피하게 되고, 교생(校生)들마저 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군역은 가난한 농민들의 가혹한 역으로 변하였으며, 문종·단종을 거치는 동안 왕권이 약화되면서 군역체제도 자연 해이해지게 되었다.
세조 때는 이와 같이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고 군역을 평준화하는 동시에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호적 개정사업과 호패제도 강화를 통한 이탈 인구 파악을 전제로 하여 1464년(세조 10) 보법체제(保法體制)를 확정하였다. 이때의 보법은 2정을 1보로 하고 전 5결은 1정에 준하도록 하며, 노비의 자녀들도 봉족수로 계산하고 누정(漏丁)·누호(漏戶)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였다.
또 그때까지 자연호를 중심으로 한 3정 1호의 원칙에서 벗어나 2정 1보로 하는 등 모순을 해결하여 군액의 대확장을 보았다. 그 결과 군액은 60만을 헤아리게 되었고 군역 부과는 평준화되었지만, 전반적으로 과다한 부담을 지는 결과가 되었다.
더욱이 호를 무시하고 그 위에 보법이 성립되었으므로 혈통관계를 무시한 단위 설정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3정 1보의 원칙으로 이전의 호적 성격(戶的性格)을 유지시키자는 논의도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토지를 준정하는 경우 그 호의 정군수보다 많은 단위수의 토지는 실제로 의미가 없다는 모순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대토지 소유자 등 지배계층의 이해관계와 크게 어긋났으므로 많은 반발이 나타났다.
성종 초기부터 보법에 대한 재검토가 시도되었다. 이러한 불평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몇 차례에 걸친 군액 감액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군액을 줄인 결과, 교생 등의 군역 면제, 토지준정법의 폐지, 노비수의 감소 등이 법제화되어 지배 계층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고, 절대 다수인 농민층의 군역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장의 일꾼이 되거나 승려가 되는가 하면, 서리나 아전 및 감영·병영의 영속(營屬) 등으로 귀속하여 고된 군역을 피하였는데, 그렇지 못하면 유리, 도망하는 현상이 15세기 ≪경국대전≫이 성립된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정 중심의 보법은 자연호 단위에서 볼 수 있었던 여정(餘丁) 등의 여유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호든 보든 간에 모두가 군역 종사자가 되어 버림으로써 토지 8결당 1부(夫)를 동원하는 요역 담당자가 노인이나 어린이 외에는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정들은 군역과 요역의 이중 부담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실제 각종 요역에 군인들이 동원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고역 때문에 군역은 마침내 그 복무를 타인이 대신하게 하고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립(代立)의 폐단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대립은 처음에는 복무자의 편의에 따른 것이었으나, 점차 한역인(閑役人)과 결탁하여 중간 이득을 취하려는 관속의 강제적 요구로 확대되었다.
또 복무자들이 모두 타인으로 대립하려 함으로써 대립가도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즉, 보인의 재정적인 보조는 월당 포 1필이었으나, 그 대립가가 15세기 말에는 8, 9필에서 16세기인 중종 말년에는 4승포(四升布) 60필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엄청난 대가를 마련할 수 없는 정병은 복무를 하려고 해도 이노(吏奴)들의 방해로 설 수 없게 되자 호·보 할 것 없이 정처없이 떠돌거나 도망하는 사람이 잇따라 나왔다. 그러나 도망자가 생기면 그 일가나 이웃 사람 혹은 마을까지도 징계하는 부담을 지워 그 폐해는 모든 이웃과 친척들에게까지 미쳤다.
조정에서는 성종·중종 때 두 차례에 걸쳐 대립가를 5승포 3, 4필로 공식화했으나, 이는 법제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중앙군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정병은 그 기록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모두 헛된 숫자였으며, 복무자의 인원수도 파악하지 못하였고, 갑사(甲士) 등 얼마되지 않는 특수병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진관에 분속되었던 지방의 정병도 마찬가지였다. 지방군의 대역(代役)은 세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나 성종대 이후로는 지방관 스스로가 군포를 받고 귀가시키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방군수포는 일반 장정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는 이점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군사를 방귀(放歸)시키는 대신 전세·공물·진상물 등 세공 수취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취해진 조처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수포가도 점차 늘어 호·보의 구분 없이 가렴주구의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방군수포는 국방이나 국가 재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대부분의 경우 각 지방 군사 지휘관인 방백·병사·수사·수령들의 사적 소유가 되었다.
이로써 비록 제도적으로 진관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는 하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지방의 유방군은 얼마되지 않았고, 이들마저 군사(軍事)를 몰라 화기는 매우 발달하였으나 그 조작법조차 몰랐다.
또한 수군의 피폐는 정병보다 더욱 심하였다. 그들의 역은 다른 병종보다 가혹했을 뿐 아니라 세습적이었으며, 또 연해의 각 포는 행정구역과 관계없이 근처 산군(山郡)에서 부족한 인원을 충당하였기 때문에 그 폐해가 더욱 극심하였다.
이러한 지방군의 피폐는 적이 침입하여도 불궁병불원토(不窮兵不遠討:끝까지 싸우지 않으며, 또한 멀리까지 추격하지도 않는다)라는 나약한 국방의식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모색된 제도가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적의 침입이 있을 때 각 읍의 수령은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이끌고 자신의 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 지역으로 가서 방어하는 병법이었다.
이와 같은 제승방략은 중종 때부터 구체화되었으며 북방족의 침입을 막는 데도 효과를 거두어 그 뒤 남방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모든 군사를 방어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방어하기 때문에 후방부대가 없어 최일선이 무너지면 다시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 임진왜란 때 순변사 이일(李鎰)이나 경상감사 김수(金睟) 등이 패배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의 군역은 보법에 의하여 복무하는 현역병인 정군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두 달 동안의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귀농하는 병농일치제가 모색되었으며, 그들이 현역으로 복무하는 동안 본인이 그 재정적 뒷받침을 하게 하는 등 이상적인 군역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은 각종 모순으로 인하여 군사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 틈을 타서 왜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군사적으로 거의 공백기에 처해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매우 당황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군사제도로서 중앙에 훈련도감, 지방에는 속오군(束伍軍)을 설치하였다.
훈련도감의 설치는 조선 후기 군사제도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즉, 당시 혼란한 가운데서 군사기능을 다시 회복하여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급료를 지급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급료병, 일종의 용병제(傭兵制)가 생긴 것이다.
이로써 조선 전기의 병농일치체제에서 병·농을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국방의 제일선을 담당한 지방군에게는 훈련도감과 같이 급료를 지급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진관체제의 보완책으로 속오군이 조직되었다. 즉, 속오군의 대상은 자기 향리를 중심으로 편제되었고, 그 기본 조직은 속오법이 적용되었으며 여기에는 공사천까지도 포함시켰는데, 이는 왜란 극복을 위한 전시 총동원체제로서 강구된 것이었다.
중앙의 훈련도감이나 지방군의 핵을 이룬 속오군은 모두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效新書≫에 의하여 삼수병(三手兵), 즉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를 바탕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성립된 훈련도감은 뒤에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이후 후금(後金)에 대한 강경책을 표방하고, 대내적으로는 이괄(李适)의 난에 따른 왕경 중심의 군사체제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어영청(御營廳) 등을 설치하는 한편, 중앙군액의 확보를 위하여 숙종 때는 금위영(禁衛營)을 설치함으로써 이른바 오군영체제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 오군영체제는 처음에 의도한 바와 같은 용병제로의 전적인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오군영 가운데 훈련도감은 모두 용병인 급료병으로 편제되었지만, 어영청·금위영은 향군을 위주로 하는 군역병으로 편제되었고, 총융청·수어청은 경기 일대의 둔전 등을 바탕으로 하는 사경제적 기반으로 유지되었다.
또한 지방군제의 핵심을 이룬 속오군은 양민과 천민의 구별 없이 편성되었으나,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군역을 담당하던 양민들은 서서히 줄어들고 영조 이후에는 천민이나 노비군으로 전락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에는 오군영, 지방에는 속오군이 편제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군역을 져야 하는 양민들의 의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양민들은 임진왜란 이전보다도 한층 더 무거운 군역을 져야만 하였다.
전기 오위제도는 제도상으로 보아 획일성을 띠고 있었으나, 왕경과 외곽 지대 방어를 맡은 오군영의 임무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제도상의 차이, 즉 용병과 징번병의 혼성과 불균형 등이 일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속오군·능로군(能櫓軍) 등 천민과 노비로 이루어진 천례군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양역군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켰으며, 공명첩(空名帖) 등의 남발로 계급체제가 문란해졌다.
거기에다 왜란 후 군둔전·궁방전 등 면세전이 광범위하게 늘어나고 지방 세력가에 의한 사유지가 확대되는 등 경제체제의 붕괴와 당쟁의 격화에 편승한 관리들의 탐오(貪汚) 및 중간 아전들의 농간 등으로 국가 재정은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담은 사실상 양역에 부가됨으로써 양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빈한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효종 때 이르러서는 정묘·병자 호란에서 입은 피해의 수습은 물론 청나라에 대한 강경자세로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재정을 돌보지 않은 채 군비 확충에 전념함으로써 국가 재정은 거의 파탄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을 타개하기 위해 양역에 대한 변통책으로 17세기 초부터 일부 지역에서만 실시해 오던 대동법을 이 시기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동시에, 17세기 말부터는 국가 재정도 충실해지고 또한 양역의 부담도 덜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양역 변통책이 모색되었다.
양역 변통에 관한 논의는 효종이 사망한 17세기 중반부터 적극적으로 대두되었다. 1682년(숙종 8)에는 급료병인 훈련도감군을 줄이는 대신, 호·보에 의한 향군으로 편제된 금위영을 설치하여, 국가의 재정도 충실히 하고 중앙군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훈련도감은 감소되지 않고, 오히려 보인의 수만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 양민의 부담만 늘어났다.
이러한 모순에 의해 표면상으로는 양민의 부담을 덜어 준다는 명목으로 첨정수괄(簽丁搜括:丁役人을 찾아내어 그 대상자들에게 서명을 하게 한 뒤 保人으로 묶어 둠)을 하였지만 그 결과 몇 년도 가지 못하여 양민의 부담만 다시 가중시키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어 군역 행정은 자꾸만 공전할 뿐, 그 폐는 더욱 지능적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오위제도를 다시 설치, 훈련도감군을 금위영에 합하고 결원이 생기더라도 보충하지 않는 방법, 또는 금위영 등의 군영을 폐지함으로써 감소된 양역 인구를 충당하는 방안, 또는 군액의 전면 감축, 감포(減布) 등이 논의되었으나 결국 양정을 전국적으로 수괄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일쑤였다.
한편, 공경(公卿)에서 천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으로부터 호포·구전(口錢)·결포(結布)·유포(游布) 등을 거두어들이자는 합리적인 방안도 제시되었으나 지배 계층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의 특징을 말해 주는 것으로, 국가 초기에는 누구나 모두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어 상하의 구분이 없는 국민개병제였으나, 차차 신분제가 확립됨에 따라 지배 계층은 사실상 군역에서 제외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군역을 진다는 것은 그들의 특권을 침해당한다고 생각하여 거부했던 것이다.
당시 비교적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나 이익(李瀷) 등도 양역 변통의 첫째 조건으로 사대부 양반은 역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후기 사회에서는 군역을 아예 양민만의 부담으로 생각하여 양역이라 하였다. 지배 계층의 군역 제외는 상대적으로 양역 인구가 온갖 농간을 수반한 수탈 재원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이는 결국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나 관리들이 군역문제를 절대다수인 일반 농민, 즉 양정들만이 지는 역으로 고정시켜 해결하려고 했으므로 거의 1세기 동안 논란을 벌였지만 첨정수괄 등의 원점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18세기에 들어 당쟁이 잠시 뜸해지고 왕권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영조는 양역문제 해결을 강력히 추진하려 하였다. 그는 우선 양역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는 동시에 호포 또는 호전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호포가 제정되면 “나도 궁방에 명하여 먼저 포를 바치도록 하겠다.”고 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이와 같은 주장은 그의 뜻과는 달리 지배 관료들에 의해 거부되고, 결국 1750년(영조 26) 균역법을 제정, 군포 한 필을 감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이를 다시 보완하였다. 균역법 실시로 영조가 의도했던 호포제는 실패하였으나, 일시적이나마 양민의 부담을 줄이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한 필을 감함으로써 생긴 국가 재정의 결손을 다른 방법으로 보충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왕실이 차지하고 있던 어·염·선세(魚鹽船稅)를 국가 재정에 귀속시켰고, 또한 지배 계층으로부터 결포(結布) 및 군관포(軍官布) 등을 받아들여 세수 증대를 꾀하였다. 동시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보완책을 강구하여 양정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는 점에서 균역법 성립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균역법은 어디까지나 전근대적인 사회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시적 재정보전책이었으므로, 양정의 입장에서 볼 때는 포 두 필을 내든 한 필을 내든 양역 폐단의 근원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균역법 실시 이후에도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그 이전보다 더 많은 양역의 폐단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19세기에 들어 이른바 세도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왕권이 약화되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야기되고 이와 함께 삼정(三政)이 문란했는데, 그 가운데 군정의 문란은 더욱 심하였다.
결국 이 시기는 양역의 폐단 등으로 사회·경제 질서가 문란해지고 중앙 오군영군의 복무는 거의 휴직상태로 점철되었으며, 지방의 속오군은 양민·천민을 막론하고 포목을 대립하는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양민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으며, 이러한 현상은 구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즉,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이들 양민의 사회의식이 향상되면서 이른바 민란으로 지배층에 반발하게 되었다.
결국 17, 18세기를 기점으로 근대 지향적인 여러 가지 개혁과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국가 재정 및 국방문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군역문제는 기득권층인 양반의 거부로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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