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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11.10

정철의 건저사건은 어떠한 사건이였나요?

역사관련 자료를 찾다가 조선시대 정철의 건저사건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 정철의 건저사건은 어떠한 사건이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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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저 문제는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도 합니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던 일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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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1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위를 이을 왕세자나 황태자를 정하는 일을 건저라고 합니다.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이라고합니다.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할 것을 경연에서 주청하자 선조의 진노하며 강계로 정철을 유배시키고 또한 이와 관련되어 윤두수 등 서인이 파직 혹은 한직으로 몰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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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저문제는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서분당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건조, 즉 왕세자 책봉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선조는 와이비의 소생인 원자가 없었고, 다만 후궁 소생의 왕자만이 있었으므로 왕세자 책립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때 건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좌의정이었떤 정철이 우의정 유성룡 ,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같이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할 것을 주청하려 합니다.

    또 정철은 이 건저 문제를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에게도 상의하고 건저 주청 문제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들은 두번이나 약속을 어깁니다.

    한편, 이산해는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김빈의 오빠되는 김공량과 결탁 , 왕의 뜻을 살피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이산해는 왕이 김빈의 소생 신성군 후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김빈에게 정철이 장차 건저를 주청한 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 김빈이 왕에게 이 사실을 울면서 호소하게 되자 왕은 이에 매우 노하게 됩니다.

    그 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정철은 경연에게 건저 문제를 거론, 이 때문에 왕이 크게 노하자 같은 자리의 이산해, 유성룡 등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건저 문제를 발설한 서인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 등은 모두 외직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이는 군주전제국가에 있어서는 흔히 볼수있는 사건이지만 , 이 문제가 동서분당의 쟁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즉, 당쟁의 한 형태라고 볼 수있는 이 사건은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로 당한 동인들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원인이 된 옥사였습니다.

    즉, 정철 등 서인들이 당시 정여립을 옹호한 동인들을 정여립과의 공모자로 몰았던 것으로 이에 동인인 이발, 이길, 백유양, 유몽정, 최경영 등은 처형되고 정언신, 정언지, 정개청 등은 귀양가게 되었ㅇ며, 노수신은 파직당했습니다.

    이 기축옥사로 많은 동인이 희생되었고 또 정권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이 옥사의 보복으로 꾸며진 것이 건저 문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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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저'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세자를 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선조 24년(1591) 때 왕세자 책봉 문제(건저)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정치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이를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라도 불립니다.

    건저 문제의 원인은 선조가 즉위한지 20년이 가까이 되었는데, 의인왕후가 임신을 못해 적자(대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빈 김씨 소생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었는데, 임해군의 행실이 좋지 않아 광해군이 세자 물망에 올랐습니다. 1591년 서인 정철(좌의정)은 남인 류성룡(우의정), 이산해(영의정)와 함께 선조에 건의하고자 하였으나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의 소생 신성군을 총애하는 사실을 알고 정철을 모함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정철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파직됩니다.

    결국, 기축사옥과 건저의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의 갈들이 심화되었으며,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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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저 문제(建儲問題)는 1591년 (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도 합니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던 일을 뜻한다고 합니다. 서인의 영수 정철은 좌의정에 오르게 되는데 이에 동인은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동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던 이산해(李山海)는 우의정이던 류성룡, 정철과 함께 세자 책봉을 논의하여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후궁 인빈 김씨를 총애했기에 그녀의 아들인 신성군의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고 있던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약속한 날에 경연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에 인빈의 오빠 김공량(金公諒)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신성군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귀뜸하였다고 합니다. 김공량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인빈김씨는 선조에게 이를 알ㄹ고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할 것을 경연에서 주청하자 선조의 진노하며 강계(江界)로 정철을 유배시키게 됩니다. 또한 이와 관련되어 윤두수 등 서인이 파직 되고 이로인해 동인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된 결과를 낳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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