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당시 시대의 여성상으로는 매우 근대적이었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사회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서양 문화와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일부 역사학자들은 명성황후가 권력욕에 눈이 먼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남편인 고종을 조종하고, 정치에 개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친척들을 중요한 관직에 등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외국과의 통상교섭을 반대하였고 서원 철폐 등으로 지방 토호세력들을 억누르고 전제왕권을 강회했던 시이버지 흥선대원군을 물리치고 고종이 직접 다스리도록 친정체제를 구축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구식군인들의 급료에 대한 불만에서 촉발된 임오군란으로 실각하여 충추로 피신하였습니다. 이후 동학혁명 당시에 외국의 군대를 아무런 방비도 없이 불러들여 한반도가 강대국들이 이권을 드러내는 각축장이 되도록한 인물입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하자 일제의 미우라공사는 일본낭인들과 함께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제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