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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4.02

히틀러의 암살작전인 발키리 작전이 궁금합니다.

영화로도 나왔던 것 같은데요. 히틀러의 암살작전이었던 발키리작전의 배경과 그 실패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발키리작전 말고도 다른 암살작전이 있었으면 어떤것인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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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는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지 여부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연락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히틀러가 살아 있다고 연락한 펠기벨 장군이 전한 소식도 단편적인 것이라서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암살시도와 쿠데타를 실패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오후 3시 45분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하여 폭발 성공을 보고했다. 곧이어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켜 총통을 암살했다'라는 위조된 군령에 의해 발키리 작전이 발동했고, 친위대 사령부가 봉쇄되었다. 올브리히트 장군은 프롬 장군에게 보충군의 동원을 요구했지만, 쿠데타 가담 여부를 그 때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프롬 장군은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총통이 죽었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침 늑대 소굴의 통신선이 복구되어 카이텔 원수로부터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프롬 장군은 쿠데타 모의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하고 상황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올브리히트 장군은 일단 도망쳤다.

    오후 5시, 늑대 소굴에서는 통신선이 복구되고 올브리히트 장군이 각 군에 발신한 발키리 작전 발동의 통신이 접수되었다. 그와 함께 각처의 반란 소식들이 히틀러에게 보고되자 히틀러는 이 암살사건이 슈타우펜베르크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그 뒤에 거대한 배후가 있음을 직감하고 장검의 밤 사건(Nacht der langen Messer)[보다 더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작전명 발키리의 한장면.

    오후 4시 30분, 베를린에 도착한 베크 장군, 올브리히트 장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행동을 개시하고 프롬 장군에게 다시 찾아가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다가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알고 분개해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프롬 장군을 그대로 체포했다.

    오후 5시,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친위대 장병들이 오히려 역으로 체포되고, 반나치 병력이 행동을 개시해 베를린에 있던 나치 당 고급 관료들을 체포했다. 오후 6시에는 쿠데타 세력의 명령에 따르던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 예하 병력들이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켰다.

    출처: 나무위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 국방군, 특히 육군은 프로이센의 군대라는 정통성과 자부심이 강했고 정치적 영향력도 큰 데다가 나치의 영향을 거부하는 노장 보수파들이 상당수 남아있었습니다. 이들 뿐만아니라 18세기부터 이어져 온 프로이센의 유명한 군인 집안 출신 장성들도 상당했습니다.

    육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의 지향점은 바로 독일 제2제국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육군 상층부의 목표는 전제군주제를 복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군부 계통 정치 세력과 나치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반공주의, 반민주주의라는 이념 면에서 공통분모가 있었고 나치의 세력이 워낙 급격히 커졌고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나치즘 사이에는 의외로 갈등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같은 국방군에서도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는 규모가 작았던 데다 해군은 총수였던 해군 원수 에리히 레더 제독과 카를 되니츠 제독 등이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편이었고 공군은 총수였던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 장군 등의 성향에 따라 제2의 친위대에 가까울만큼 친나치조직이었으며 해공군 모두 육방부화를 시키려건 육군에 좋은 감정을 가진 편이 아니였으므로 이런 반나치성향운동은 전반적으로 육군 장교들이 주도합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국방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 노장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는데 그러자 이에 분노한 국방군, 육군 내 장교들은 반히틀러 세력을 규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모의합니다.

    암살실패이유로는 폭약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이 든 가방을 아쉬운대로 폭사시키기 좋은 위치에 놓고 간 뒤 호이징거 장군의 전속부관인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방에 걸려 넘어질 것을 우려해 히틀러 가까이에 놓인 폭탄가방의 위치를 테이블 다리 너머로 바꾸면서 결국 두꺼운 목재로 된 회의장의 테이블 다리가 히틀러의 방패가 되었습니다.

    또 원래 회의장이었던 밀폐된 콘크리트 벙커가 아니라 창문 등이 있어 환기가 가능한 일반 건물인 것도 원인이며 폭약의 양이 폭압만으로 즉사시키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키리 작전은 1944년 7월 20일에 나치 독일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작전으로, 독일 군인들 중 일부가 계획하였습니다. 이 작전을 주도한 인물은 독일 군인이자 항공기 설계자이기도 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었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의 독재를 비난하고, 나치 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발키리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발키리 작전은 군사적인 계획과 더불어 히틀러의 독재를 비난하는 내용의 많은 서류들을 작성하고, 이것들을 기밀리에 널리 배포하며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작전 당일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와의 만남에서 작전에 실패할 것임을 알게 되었고, 작전을 중단하려 했지만, 이미 다른 군인들이 작전을 실행했기 때문에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 때, 히틀러는 일부 다친 상태로 살아남았습니다.

    발키리 작전의 실패 이유는 다양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작전 준비 과정에서의 실수와 대처 미숙함, 그리고 작전 당일 슈타우펜베르크의 결정 변경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작전 참여자들의 불신과 독일 내부의 나치당 간부들의 반대도 작전의 실패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발키리 작전 이외에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다른 작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독일 항공군의 헤르만 게링 대장이 주도한 작전으로, 1943년 7월 11일 '오페라션 하이드라'라는 이름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도 실패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