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이후에도 일본 내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지지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지지파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 지위에 오르면서 에도 막부가 성립되었고, 이후 조선과 일본은 200여 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명연합군과 일본이 약속한 내용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조명연합군의 세력이 강하여 곳곳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와중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을 접한 왜군 수뇌부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철수를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으로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조명연합군이 순천왜성을 공격하여 고니시 유키나와 부대에게 대승을 거두고 고립시켜버립니다. 그러자 고성과 사천에 있던 시마즈 부대가 500여척을 거느리고 유키나와 부대를 구출하러 오게 되고 이를 예측하고 잠복중이던 조명 연합수군에게 200척이 대파당하고 150척이 반파되었으며 150척은 도망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적을 섬멸하기 위해 군사들을 독려하며 북을 치며 사기를 복돋우던 중 적의 흉탄에 맞아 죽게됩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패전으로 전의를 상실한 채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일본의 도쿠가와 이예야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조선에 대해 선린외교를 강조하여 우호적인 관계가 수립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