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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굴뚝새243
뽀얀굴뚝새24323.12.08

연산군은 왜 폭정을 하는 임금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느 영화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연산군이 정치는 뒷전이고 주색에 빠져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봤는데

그러한 상황이 되기까지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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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94년 12월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4년 뒤인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폭군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즉위 초에는 성종 대의 평화로운 모습이 계속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 에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평화롭기만 할 것 같던 4년 동안 연산군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림파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연산군에게 간언하고 학문을 강요했고 사림을 배척 하던 연산군에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 세 력들이 붙게 됩니다.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극돈은 김일손이 작성 한 사초의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실록 작업의 당상관이었던 이극돈마저 파면되었지만 조의제문의 존재를 연산군에게 알렸던 유자광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고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림들이 대대적으로 화를 입었던 사건을 무오사화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사림도 완전히 제거된 마당에 연산군에게 간언하는 이도,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으며 그의 곁에는 한결같이 감언이설하는 간신들만 가득했습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습니다. 연산군의 사치로 국가 재정은 점점 바닥나기 시작했고 이것을 기회로 삼은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고가 비어간다는 것을 인지한 연산군이 이제는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반납할 것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고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까지 위협을 당하게 되자 대신들은 왕에게 지나친 향락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궁중파와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는 연산군의 공신 전 몰수에 반발하고 나섰고 궁중파는 왕의 의도대로 하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립 상황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으며 그는 성종 시대에 사림파에 의해 탄핵받아 귀양을 간 일이 있었고 이에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신하들 사이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남아있던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이를 위해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 사건을 이용하게 됩니다. 임사홍에 의해 자신의 친모인 윤 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격노하여 엄청난 살인극을 벌이게 됩니다. 윤씨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이들은 사형 당하고 이미 죽은 이들 역시 부관참시에 처해지게 되며 이 밖에도 많은 이들에게 연좌죄까지 씌워져 관련자들의 가족, 자녀들까지 화를 입게 됩니다.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뿐 아니라 그 잔인함까지도 이전의 무오사화에 견줄바가 못되었고 갑자사화 이후 자신에게 제동을 걸 세력을 모두 제거한 연산군의 폭정을 더욱 노골화되었고 그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한글 투서가 전국 각지에서 날아들정도로 폭군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과 같은 경우에는

    초기에는 오히려 국정운영을 잘하였다는 평가도 있으나

    갑자사화 기간에 보인 옥사의 잔혹성으로 인하여 비판 받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약 2년 동안 엄청난 폭정을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