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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0

고려시대 있었던 노비의 난 '만적의 난'의 발생 배경은 무엇인가요?

고려시대 있었던 노비 만적이 일으켰던의 난 '만적의 난'의 발생 배경은 무엇인가요?어떻게 하면 노비가 병사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어 여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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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8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적의 난은 당시 고려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폐가 극에 달하자 당시 최고 위치에 있던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다른 노비들과 신분해방운동을 벌인 일로 만적의 난은 최초의 신분해방 운동입니다.

    하지만 당시 거사 당일 모인 노비들은 몇 백명도 채 되지 않았고, 날자를 다시 정하고 해산이 되었다가 한 노비가 상전에게 이 일을 고하여 결국 만적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게됩니다.

    비록 실패로 끝난 만적의 난이지만 이 만적의 난은 최초의 신분해방 운동이였다는 의의를 가지고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소수의 권신(權臣)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에 기생하여 노비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무신란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현저해져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무신집권기에 천민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무너져갔다. 그리고 당시 농민들의 봉기 또한 빈발함으로써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향·소·부곡민이나 천민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76년(명종 6)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천시되었던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이나, 1182년(명종 12)전주에서 일어난 관노(官奴)들의 봉기가 그것이었다. 1196년(명종 26)에는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에 반발해 상장군 길인(吉仁)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노비들도 이에 참여한 사례가 있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만적의 난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1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70년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의 정치혼란과 함께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했고 중앙정부는 정치투쟁과 권력다툼으로 관리기능이 약화되었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고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농민과 노비에 의한 반란까지 유발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규모적이고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 입니다.

    만적은 당시의 집권자인 최충헌의 사노로 6명의 노예와 함께 개경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 공사의 노비들을 모아놓고 난을 일으킬 의논을 합니다.

    그는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는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수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의 고통만을 당할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비의 문적을 불질러 우리나라로 하여금 노비가 없는 곳으로 만들몀ㄴ 우리도 공경대부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수있다.' 뜻의 선동열설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신종 1년(1198), 당시 노비 신분의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노비해방운동. 일반적으로 역사학에서는 한국사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자연재해, 생활고, 탐관오리들의 수취 때문에 일어난 민란은 조선이나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에서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주동자가 뚜렷하게 신분 해방을 목표로 삼았던 경우는 만적의 난이 최초이다.

    -출처:나무위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벌귀족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이끌던 고려사회는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빚어지는 가운데, 무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

    정변 이후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하급 무관 및 군인들이 문벌귀족을 제치고 정치를 주도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게 되었고. 특히 노비와 같이 낮은 신분의 이들이 무신정변의 과정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대표적으로 아버지는 소금장수, 어머니는 옥령사라는 절의 노비였던 이의민(李義旼)은 정변 과정에 참여하고 의종을 살해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끝내는 정권을 잡기도 한 것이다.

    봉기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는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비신분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1차 목표였습니다

    .

    당시 고려사회는 노비문제가 사회적 중요 문제였지만 단순히 향소 부곡이란 특수구역에 거주를제한 하고 행동에 제약을 주게되자

    천인 신분으로 일제히 일어나 주인을 죽이고 천적을 불태워 고려에서 천인의 존재를 없앰으로써 그 같은 신분에서 해방이 되고자 기도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만적 등의 항거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권의 탈취까지도 획책했다는 점에서 보다 큰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무신정변의주동자인 이의민이 노비 출신였다는점에 이들에게 가능성을 밝혀준것입니다

    신분의 해방과 정권탈취를 기도한 노예 중심의 봉기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사회 제도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인 향 소 부곡에 집단적으로 거주케 하여 이들의 반란이나 항거를 제도적으로 차단시켜둔 상태였습니다 억제는 반발을 가져온다는 논리처럼 이들에게 엄격한 통제가 오히려 고려사회제도를 붕괴시킨것입니다

    결과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이러한 천민반란은 무신정권의 강경진압에 의해 실패하였지만, 고려 전기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벗어나는 원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이후 고려사회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신집권기에 천민 출신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무너져갔다. 그리고 당시 농민들의 봉기 또한 빈발함으로써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향·소·부곡민이나 천민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적의 난은 1198년(고려 신종1)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 입니다.

    민란의 배경> 1170년 고혀 중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의 정치현안과 함께 신분계습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 하였습니다. 중앙정부는 정치투쟁과 권력다툼으로 관리인의 약화 되었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하되었습니다. 결국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 농민과 노비에 의한 반란까지 유발시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거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 입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인란 이후 신분질서의 와해와 피지배층의 사회의식 성장은 광범위한 민중항쟁을 유발시켰는데, 이 중 하나가 만적의 난이었다.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1198년 5월 미조이·연복·성복·소삼·효삼 등과 함께 개경 북산에서 공·사 노비들을 모아놓고 봉기를 계획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에 모인 무리가 수백 명에 불과하여 거사가 어렵게 되자 거사일을 바꾸어 보제사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으나, 한충유의 가노인 순정이 밀고하여 만적을 비롯한 주동자 100여 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짐으로써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만적의 난은 실패했으나 무인정권시기에 천민계층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의 조직적인 신분해방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만적의 난은 고려 신분제 변동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후 민중봉기의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