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열린 축제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렀나요?
안녕하세요? 성균관의 축제 때 모의재판을 열어 판결을 내리기도 하고, 과거시험 놀이를 하는 등 자신들만의 놀이를 만들어 즐겼다고 하는데요~ 그 축제의 이름을 무엇이라 불렀나요?
조선시대 성균관에서 다양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특별한 명칭은 없지만 축제일은 명륜당 앞마당에서 외부인의 출입이 허용된 날에는 유생들과 가족, 친척들이 함께 참여해 먹거리와 놀이 문화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이날 유생들은 "유소"라는 상소를 올리는 행사를 통해 국가와 소통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1명 평가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성균관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이었던 것 뿐만 아니라 유교의 여러 연례행사가 펼쳐지는 곳이었습니다. 최고의 인재들을 국가가 양성하는 곳이었던 만큼, 성균관에서 행해지는 행사의 규모와 중요성 또한 최고 수준이었죠.
성균관의 대표적인 의례 행사 3가지를 소개합니다.
입학례
입학례란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입니다. 이는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였습니다. 학문과 덕망을 갖춘 후계자를 양성하고 교육의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죠.
석전례
유교의 성인과 현인들을 추모하고 그 덕을 기리며 가르침을 되새기는 유교 행사로 매년 봄 가을에 진행합니다.
석전례의 진정한 의미는 충과 효를 되새길 뿐만 아니라, 누구나 노력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되새기고 표현하는 데 있었습니다.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 성격을 띄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눈과 귀가 쉴 틈이 없는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사례
'활쏘기가 국가 주요 행사라니?!'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텐데요. 대사례는 단순히 선비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의 하나로서 활쏘기 실력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활쏘는 사람의 덕을 엿보는 데 의미를 두었습니다. 또한 먼저 석전례를 행한 뒤 거행하는데, 국가의 경사스러운 행사인 만큼 주로 과거를 치른 후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진행했습니다.
대사례는 임진왜란 이후 폐지되었다가 약 200년이 지난 영조대 다시 부활하였으며,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사례도(大射禮圖)」 역시 영조대(1743년, 영조 19)의 기록입니다. 과녁을 맞힌 자와 맞히지 못한 자를 동서로 갈라서 세우고, 맞힌 자에게는 상품으로 옷이나 채단 같은 것을 하사하고, 맞히지 못한 자들에게는 벌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