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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3

고려 후기문학에서 경기체가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서요.

고려후기에 전반적인 사회변화가 모색되었는데 문학에서도 신진 사대부와 민중이 주축이 되어 큰 변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궁금한게

1. 경기체가의 의미가 뭔가요?

2. 이 당시 유명한 경기체가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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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6.23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중엽 이후 발생한 문학 장르로, 노래 말미에 景긔엇더하니잇고, 또는 景幾何如라는 구가 붙어 경기체가라 부릅니다.

    한림제유의 한림별곡이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이 나누어지고 여음이 있는 속악가사의 형식을 따라 만든 사대부들의 노래이다.


    대부분 ‘경(景) 긔 엇더ᄒᆞ니잇고’ 또는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 구절이 제 4․6행에 있으므로 “경기”를 따서 붙여진 갈래 상의 명칭이다. 이외에도 이 구절 전체를 따서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경기하여체가(景幾何如體歌)라고 하기도 하고 노래 제목에 붙은 ’별곡‘ 때문에 별곡체(別曲體)·별곡체가(別曲體歌) 등으로 불린다. 지금까지 발견된 작품은 고려 후기의 작품이 3편, 조선시대의 작품이 23편으로 모두 26편이다. 조선시대 작품 중에서 「관산별곡(關山別曲)」은 전해지지 않으므로 현존하는 고려~조선시대 경기체가 작품은 모두 25편이 된다.


    최초의 작품은 고려 고종조(1214∼1256)에 지어진 「한림별곡(翰林別曲)」이고, 최후의 작품은 민규(閔圭)가 1860년(철종 11)에 지은 「충효가(忠孝歌)」이다. 이 가운데 반석평(潘碩枰)의 「관산별곡(關山別曲)」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 작품을 수록한 문헌은 「한림별곡」이 수록된 『고려사』「악지: 속악」을 비롯하여 『세종실록』 및 15세기 전후의 조선조 문헌 『악학궤범』·『악장가사』등이다. 경기체가는 수록문헌의 성격에 의하면 궁중 종합공연예술인 정재의 일부로 악장적 성격을 띄고 있다. 이외에 족보 및 개인의 문집류에 수록되어 가문 찬양 등의 구실을 한 것도 있다.

    경기체가의 성격은 수록된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최초의 경기체가 「한림별곡」이 수록된 곳은 『고려사』「악지」의 속악조로 이미 궁중 음악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악학궤범』·『악장가사』등에 대부분 수록되었고(표 참조), 『조선왕조실록』 등에 수록된 연행 관련 기록을 통해서 악장으로서의 성격을 확실히 한다.


    따라서 경기체가는 악장으로서의 기능을 중심으로 분류하면 악장 계열과 비악장 계열로 나뉜다. 악장 계열은 고려조의 「한림별곡」을 필두로 조선 초기 악장인 「상대별곡」·「화산별곡(華山別曲)」·「가성덕(歌聖德)」·「축성수(祝聖壽)」·「오륜가(五倫歌)」·「연형제곡(宴兄弟曲)」·「배천곡(配天曲)」등을 들 수 있다. 「한림별곡」이후 조선 초기의 작품에서는 「한림별곡」의 연행상황을 유지하면서도,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제시하고 유교적 이성에 입각한 질서 의식을 노래하는 악장으로서의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국가 악장적 성격이 변모된 경기체가는 가문을 칭송하거나 불교 포교나 유교 의식을 노래하는 작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문이나 특정 집단을 칭송하는 것으로 「죽계별곡(竹溪別曲)」·「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금성별곡(錦城別曲)」이 있다. 가문이나 집단에 기억할 만한 일이 일어났을 때 가문의 명예를 드러내고 조상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가문의 악장 구실을 한다. 특정한 집단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부르기 위해 지은 것으로 「한림별곡」의 특성과도 통한다.


    불교포교를 위한 경기체가는 「미타찬(彌陀讚)」·「안양찬(安養讚)」·「미타경찬(彌陀經讚)」·「서방가(西方歌)」·「기우목동가」등이 있다. 모두 세종조 전후의 시기로 경기체가 전성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승려들의 작품인 이 노래들은 모두 아미타불과 서방의 안양정토(安養淨土)에 대한 찬양으로 불교적인 교리를 노래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주세붕의 작품인 「도동곡(道東曲)」·「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육현가(六賢歌)」는 작자가 백운동 서원을 세우면서 안유(安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할 목적으로 지었다. 개인의 정서를 노래했다기보다 유학을 숭상하는 계층을 찬양하는 유교의식을 위한 노래이다.


    비악장 계열의 가장 큰 특징은 연행 장소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악장 계열의 노래가 궁중 혹은 의식의 장소에서 불리었다면 비악장 계열의 노래는 자연 속에서 불리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노래 내용에도 영향을 미쳐 잔치 노래로의 성격에서 개인의 노래로 정착하게 되었다.


    악장이 제작되는 시기의 비악장계 작품으로는 「관동별곡(關東別曲)」·「불우헌곡」이 있고 악장 제작 종식 이후의 작품 「화전별곡(花田別曲)」·「독락팔곡」·「충효가」가 있다. 「관동별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종조 이후의 작품으로 경기체가 본연의 악장적 기능이 축소되고 상실되면서 갈래의 본질과 멀어지고, 형식상, 악곡상의 제약으로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지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기체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 말과 조선 초기까지 독립된 형태의 로 존재하다가 임란 이후 사라진 시가입니다.

    고려시대의 유명한 작품은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상대별곡, 변계량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