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은 언제부터 유래되어서 입게 되었나요
요즘에는 거의 한복을 입지 않지만 가끔 명절때에 한복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데 이런 한복은 언제부터 우리 일상속에서 입기 시작하였나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복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복이 풍성하게 발전하였으며, 각 지방마다 다양한 스타일의 한복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는 한복의 디자인과 색상, 소재 등에 대한 규제를 두어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복은 고대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당시에는 특별한 의미나 상징성이 없이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복은 점차 의식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복이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벽화로, 기본 구조는 상의, 허리띠, 하의 , 모자로 이루어졌으나 이후 변화하면서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띠는 고름으로 간소화, 두건은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하게 됩니다.
후에 만주족 복식을 수입해 만든 마고자와 서양 복식을 수입해 만든 조끼를 추가하여 지금의 한복 형태가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조선시대에 이미 초의생활(草衣生活)에서 벗어나 칡과 삼으로 짠 옷감을 사용하고, 전잠(田蠶)과 직조의 기예가 늘어감에 따라 의류문화에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후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에는 옛 사기(史記)나 고분벽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유(襦) ·고(袴)와 상(裳)·포(袍)를 중심으로 한 복장이었으며, 여기에 관모(冠帽)·대(帶)·화(靴) 또는 이(履)가 첨부되었다.
유는 저고리로서 상체의 옷이고, 고는 바지, 상은 치마로서 하체의 옷이며, 여기에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를 띠며, 발에는 화 또는 이를 신어 포피(包被)로서의 의복의 형태를 갖추는 동시에, 그 위에 두루마기로서의 포를 더함으로써 한대성(寒帶性) 의복 곧 북방 호복(胡服) 계통의 의복을 나타낸다. 이에 있어 유(저고리)는 곧은 깃에 앞을 왼쪽으로 여몄으며[左衽], 소매가 좁고[筒袖], 길이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오늘날의 승복 '동방'과 비슷한 것이었으며, 허리에 띠를 둘렀는데, 특히 깃·도련·소맷부리에는 빛깔이 다른 천으로 선(襈)을 둘렀다. 이후 중국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중국복식의 영향을 받아 좌임이 우임(右衽)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지는데[寬袖], 선은 오늘날에도 회장·끝동 등으로 남아 있다. 이 저고리를 신라에서는 위해(尉解)라고 일컬었는데, 오늘날 저고리를 우티·우치라고 하는 방언(方言)도 이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고리라는 표현은 조선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 선전의(選奠儀)에 '赤古里'라는 말로 처음 나온다.
고(바지)는 용도에 따라 폭과 길이에 변화가 있었는데, 양복바지와 같이 폭이 좁은 궁고(窮袴:細袴)와 지금의 한복바지와 같은 대구고(大袴:또는 寬袴)가 있었고, 오늘날의 잠방이와 같은 가랑이가 짧은 곤(褌)이 있었다. 궁고는 곤과 더불어 민층의 하의(下衣)였고, 대구고는 상류층의 하의였는데, 발목을 대님으로 묶기도 하였다. 이 바지를 신라에서는 가반(柯半) 또는 가배(柯背)라 하였는데, 지금 우리말의 고의·고쟁이도 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지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인지(鄭麟趾)가 '把持'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이 호칭은 이미 널리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는 여자도 바지를 입는 것이 기본 복제(服制)였기 때문이다.
상(치마)은 여자 전용의 하의로서, 고와 상을 혼용하였다. 형태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폭이 넓어 땅에 끌릴 정도였으며, 허리 부분부터 치맛자락 끝까지 잔주름이 잡혔고, 다시 치맛자락 끝에 일종의 장식연(裝飾緣), 곧 선을 둘러 조선시대의 스란치마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상을 치마로 표현한 첫 기록은 앞에서 든 원경왕후 선전의에 '赤古里'와 함께 나오는 '赤亇’로서, 한글로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嬪)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한중록(閑中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포(두루마기)는 표의(表衣)를 뜻하는 것으로서, 당시에는 유와 고 위에 착용하여 양복의 외투와 형상이 비슷하였는데, 오늘날의 두루마기에서와 같이 직령(直領)·교임(交衽) ·중거형(重裾型)의 것이 아니고 직령·교임·직수형(直垂型)의 것이었으며, 여기에 띠를 둘렀다. 이 포를 당시에는 왕공(王公) 이하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모두 보편적으로 착용하였다. 포를 가지고 두루마기라 한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옷의 폭을 쭉 돌아가면서 다 막았다는 데서 나온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며, 주의(周衣)라는 명칭은 이를 거꾸로 한자화(漢字化)한 것이다.
이러한 한복의 기본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 다만 관복(官服)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眞德女王 2년)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습용함으로써 고려·조선시대까지 중국의 제도를 준용하였다.
중국과 한국은 정치·문화 교류를 통하여 양국의 복식도 서로 영향을 끼쳤는데, 신라의 경우는 반비(半臂)·배당(褙襠)을 비롯하여 여자 포제(袍制)로서의 활수의(闊袖衣)·색사대(色絲帶)가 그것이다. 고려 때에는 제25대 충렬왕(忠烈王) 이후 원(元)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이 되면서 복식 풍습도 몽골풍(蒙古風)을 많이 따랐는데,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제31대 공민왕(恭愍王)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골풍은 사라졌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골 복식의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게 되었다. 또 여자 화관(花冠)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골인의 고고리(古古里:姑姑, 顧姑)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壬辰)·병자(丙子)의 두 국란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의 자각심이 일기 시작하여 민족 복식을 형성한다. 이에서 두드러진 것은 남자의 포제와 입제(笠制)이며, 여자의 예복과 친의류(襯衣類:속옷류)이다. 남자의 포제는 포의 기본형에서 고려의 백저포(白紵袍)를 거쳐 직령(直領)→ 도포(道袍) → 창의(氅衣)에서 조선 말기의 주의(周衣)로 발전하며, 입제는 평량자(平梁子) → 초립(草笠)·흑립(黑笠)으로 발전한다.
여자의 예복은 중국의 활수의·색사대에 속한 적의(翟衣)·대삼(大衫) 등이 원삼·활옷·당의 등으로 국속화(國俗化)되었고, 친의류는 단속곳·바지 또는 고쟁이·속속곳·다리속곳·너른바지 등으로 다양해진다. 그리고 조선 말 개화기에는 양복·양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복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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