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궁금해 지는데 우리나라에 과학수사는 언제 도입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관을 박달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해 체결한 을사보호 조약은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1909년에는 사법권과 감옥사무를 일본에 박탈당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통감부 감옥관제를 공포에 시행하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자 동관제를 폐지하고 조선 총독부와 소속 관서의 관제를 제정했으며 조선총독부 관혹 관제도 제정이 되어 10월 1일부터 시행이 되었습니다 한편 1911년에는 일본의 형법,동시행령,형사소송법 등 11개 법률을 인용하도록 규정했고 동형법의 누검 가중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법리국 행형과에 지문계를 설치하고 전국 형무소의 수용자 지문을 채취해 누범 조건인 전과 유무의 확인 자료로 이용했습니다 그 뒤 자연 발생적으로 범죄현장에 유류된 지문에 의해 범인을 수색하는 단계까지 이르러 1931년 8월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 지문계를 설치하고 수형자는 물론 범죄 용의자와 경범 위반자 등의 지문을 채취해 보관하고 인사감정에까지 이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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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지의 내용 이야기는 184년 (후한 영제 중평 원년)으로부터 280년 (진 무저 태강 원년)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연의는 기본적으로 유비가 주인공이며 모든 에피소드는 유비를 중심으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중국 인구사에 따르면 한나라 중기 5,600만 명이었던 인구가 한나라 말 극심한 혼란기에 3000만 명으로 줄었으며 삼국지 시대에는 1600만 명으로 인구가 급감한 전란으로 인한 참담한 시기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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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는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부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후 40시간 후에 자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요제프 괴벨스가 국가 수장직에 올랐으나 괴벨스는 다음 날 자살하고 대통령인 "카를 되니츠"가 1945년 5월 8일 연합군에 항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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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석유파동 혹은 오일쇼크는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발생하였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차 오일 쇼크는 전쟁에서 패한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지원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게 석유 수출 금지조치를 취하게 되고 추가적으로 석유 생산량 감축, 석유 가격 인상 조치로 보복합니다. 이 보복 조치로 인해서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1970년대의 오일 쇼크는 각각 1973년에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와 1979년에 발생한 제2차 오일 쇼크로 세분화되며 전자는 아랍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 정책으로 후자는 이란 혁명에 따른 정치적 불안으로 석유공급 부족 및 가격 폭등이 일어나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사건을 가리킵니다.이 사태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이래 서방 선진국들이 누려오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중산층 확대 등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종말이 찾아왔으며 중동 지역에서의 격렬한 정세 변화로 인해 여러 전쟁이 발발하였지요. 한국에서는 중동 산유국의 건설 수요 확대로 인해 근로자들이 대거 중동으로 파견되어 중동 붐이라는 키워드가 유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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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결의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사자성어인데 의형제는 누구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원 결의는 후한 말 영제시대 황건적이 일어나 유주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던 때에 유비 관우 장비가 장비의 집 뒤뜰에서 만나 의형제를 맞은 일을 말합니다. 관우와 장비는 형제 같은 우애로 지내고 있었는데 후한의 왕손 유비를 만나서 장비에 집 뒤뜰에서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훗날 이 일을 복숭아 밭에서 맺은 결의라고 하여 도원 결의라고 불렀습니다. 황건의 난이 일어났던 서기 184년에 현재의 허베이성 바우딩 시 줘저우시에 해당되는 유주 탁현에서 도원결의가 맺어졌는데 삼국지 판본에 따라 장비의 집이 아닌 유비의 집에서 결의했다고도 나옵니다. 이때의 결의는 후세 사람들에게도 아주 유명한 결의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연의에서 지어낸 이야기일뿐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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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일 전쟁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 간의 벌어진 전쟁입니다.일본은 청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조선의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1894년 7월 경복궁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도발을 시작했고 이어서 황해와 평양 등에서 벌어진 본격적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중국 본토를 공격하여 점령해 들어갔지요. 청국은 강화 회담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도 이에 의해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전쟁이 마무리가 됐지요. 이 조약으로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한반도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 결과 조선은 뿌리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는 벗어났으나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으로 바뀌어 인적, 물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혹독한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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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국회의원에 역사상서 최다선 의원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최다선 국회의원은 모두 9선을 기록한 3명이 있는데 김영삼,박준규,김종필 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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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도 예술 혹은 문학 등이 존재하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물론 북한에도 예술과 문학이 존재하지만 모든 것의 중심이 주체 사상을 위하여 하는것이기 때문에 예술이나 문학이 김일성 부자를 주로 찬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탈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사는곳으로 문학과 예술이 있는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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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기원은 언제 부터 였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의학의 기원은 단군 신화의 쑥과 마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민족 고유의 본초에 대한 독자적인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는 한의학과 불교 의학의 전통 속에서 한의학의 이론적 기틀이 형성이 되었지요. 중국의 고대의학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조선 이후 한사군 시대부터인데 특히 낙랑군이 중국과 밀접하게 문화교류를함으로써 의학도 낙랑군을 통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전파되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원시의약이 발달되어 있었으며 "황제내경" 안에 '폄석침술'이 동방에서 전래하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 시대부터 돌침술과 뼈 침술 등이 발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좋은 약재들이 많이 생산되어 "본초경"에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물들의 효능이 실려 있고 이 약물들을 이용한 치료 처방도 기록되어 있지요.이밖에 일본의 '의심방'이라는 의서에는 "신라법사방" "백제신집방" 등 우리나라 의학 처방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우리나라 의학이 전파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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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지역의 이스라엘과 이란의 역사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늘 날 이란과 이스라엘은 주적으로 국가간 관계뿐만 아니라 국민 감정도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대부분 무슬림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이란과의 관계는 매우 나쁩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종교 확장을 위한 성전의 명분으로 삼고 있고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에 폭탄을 던지고 있는 모든 세력은 이란의 군수 물자와 자금을 지원받고 있지요. 단순히 대리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라크 시리아 내전에서의 개입을 통해 양국가의 쌓은 영향력으로 이스라엘과의 국경지대에 이란군의 주둔지를 다수 만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이를 폭격하는 사실상의 전쟁 상태에 달해 있는 상황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는 사우디아라비아랑 이란의 관계보다 훨씬 더 험악한 사이이죠 시아파 수니파 같은 종교적 문제와 지리적 문제로 갈등은 겪을지언정 같은 중동인인데다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점들이 많고 다시 국교를 맺을 정도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지만 이란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이 화해하고 국교를 정상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이란과 이스라엘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헌상으로 기록된 최초의 이란 이스라엘 사이의 접촉은 성경에 실린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 유대인의 해방이었으며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이 복원되었죠.이후에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7세기 초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급격히 압박하여 위기에 몰아넣었을 때 유대 지방 또한 장악했죠. 그러나 얼마 후 탈환당하였고 이후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둘 다 이스라엘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팔라비 왕조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중동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테헤란에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설치되었고 이는이란 국민 상당수가 무슬림이긴 했지만 당시 이란이 아랍 국가도 아니고 팔라비 2세가 세속화 정책을 추진 중이었고 수니파가 다수인 다른 중등 국가들과 같이 달리 시아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과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는데 중동 전쟁 당시 이란은 이스라엘에 여러 가지 지원을 했으며 이스라엘은 홍해에 접한 항구 도시인 에일라트를 통해 이란에서 상당량의 이란산 석유를 수입하는 등 미국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상당히 중요한 국가로 자리매김했지요. 심지어 군사적인 교류도 추진하여 어뢰와 미사일, 탄도미사일 개발에 있어서 서로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국적의 항공사인 엘알은 텔아비브- 테헤란을 오가는 직항편을 개설했으며 테헤란에 지사를 두기도 했었지요. 이 시기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도 성장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우호관계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180도 바뀌게 됩니다.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가 미국을 큰 사탄,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이라고 선언하면서 단교하였고 이란 이스라엘 분쟁으로 지금까지 적대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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