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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이 일어나는 이유와 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 성종[조선](成宗)의 맏아들이자 중종의 이복형인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廢妃) 윤씨와 관련된 개인사, 그리고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의 폭정으로 인해 당대에 많은 원망을 사고 있던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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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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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화랑들은 화랑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자격조건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화랑도 조직은 여러 곳에 퍼져 있었고 각각 우두머리격인 1명의 화랑이 있었는데 이 화랑은 주로 귀족의 자제로 이뤄졌으며[7] 화랑들을 통솔하는 총지도자격인 위치로 국선(國仙)이 있었으며 국선에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도 국선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국선이 되려면 무조건 진골 아니면 성골이어야만 하며 6두품 이하는 국선이 될 수 없었다[8] 그리고 이 위에 화랑들을 관리하는 '화주'(花主)가 있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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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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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이 실제로 장수 해서 장수왕 이라고 하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수왕(長壽王)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다. 이례적으로 오랜 수명을 살았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왕호를 받았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유업을 이어받고 평양 지역으로의 천도를 단행하는 등 국가 체제의 변화를 도모하는 한편 능동적인 외교를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서 고구려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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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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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로 보존중인 금동대향로는 역사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백제는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어 ‘잃어버린 왕국’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백제 문화를 오롯이 담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견으로, 백제는 1,400년 후 재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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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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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있는 관왕묘는 어떤 유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관왕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관왕묘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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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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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종묘대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종묘제례 宗廟祭禮 국가무형문화재종묘제례는 조선의 국가 사당이며 세계유산인 종묘에서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종묘대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납일 등 1년에 5번 지냈으나 현재는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제향 의식뿐 아니라 제례악과 일무 등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종묘제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종합적인 의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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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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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돈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 보관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시대의 자금 융통은 보寶, 장생고長生庫, 계契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보는 어떤 사업을 위해 기본 재산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얻은 이익으로 운영하는 재단이다. 주로 불교 관련 재단이 많았으며 보물 같은 존재라고해서 보라고 불렀다. 장생고는 서민들에게 자금을 대여하고 이자를 받는 서민금융기관 역할을 했다. 또 계는 특수 관계인들이 자금을 모으고 융통하는 방법으로 사용됐으며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후기에 성행했다. 이 시대에는 절대 가난으로 저축은 별로 없었을 것이며, 있었다고 하더라도 금융자산 형태가 아닌 실물로 저장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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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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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행주대첩 등 대첩의 의미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반적인 전투보다 높은 단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대전(大戰)과도 의미가 약간 겹치지만, 대전은 규모 자체가 거대한 전투를 이르고 대첩은 크게 이겼다에 중점을 두는 단어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대첩으로 흔히 불리는 황산대첩, 행주 대첩, 청산리 대첩의 경우 참여한 병력은 기록의 모호함을 감안해도 수천~5만 미만 정도로, 이 정도면 한국사 안에서만 따져봐도 손꼽히게 병력규모가 큰 전투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이들은 대전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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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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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이 정말 붕당을 만들려고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종 때 조식(趙軾)이란 사람이 일찍 과부가 된 누이의 노비와 땅을 빼앗고, 누이가 다시 김주라는 사람과 재혼하려 하자 김주를 누이의 강간범으로 고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한 처결 문제로 당시 승지였던 임사홍과 현석규 사이에 이견이 생겼고, 현석규 측의 판단이 옳다고 결론이 났지만 임사홍이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일이 커졌다. 유자광은 이때 임사홍 등과 붕당을 짓고 남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동래로 귀양을 갔다. 유자광은 이 시기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여죄들이 더해지면서 많은 탄핵을 받았다. 결국 성종의 처분으로 유자광은 4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 이후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실직을 받지 못하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되어 절치부심해야 했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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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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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왕실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707년부터 법적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쳐져 한 나라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이 되었고, 1801년 아일랜드 왕국까지 합병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되었다가 1922년 아일랜드 일부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떨어져나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으로 국호를 바꾸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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