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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스페인 군부는 왜 내전을 일으켰는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치적으로 좌우의 대결이 심하였던 시기에 투표의 결과로 좌파와 우파간의 내전이 발발했던 것 입니다.자료를 찾아보니 주스페인 대한민국 대사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어 찾아 붙여드립니다. 1931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화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왕정이 폐지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여성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1933년 선거에서는 우파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1936년 선거에서는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다시 승리하여 마누엘 아시냐 총리를 중심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좌파 정권의 탄생과 개혁에 불안을 느낀 군부가 프란시스꼬 프랑꼬(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내전(1936~1939)이 발발하였다.공화파는 쿠데타군보다 도덕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으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질적인 집단의 혼합체로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반면 국민전선은 잘 훈련된 군대, 수적인 우세 그리고 독일과 이태리의 파시스트 정권의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https://overseas.mofa.go.kr/es-ko/brd/m_8096/view.do?seq=674915&srchFr=&amp%3BsrchTo=&amp%3BsrchWord=&amp%3BsrchTp=&amp%3Bmulti_itm_seq=0&amp%3Bitm_seq_1=0&amp%3Bitm_seq_2=0&amp%3Bcompany_cd=&amp%3Bcompany_nm= 원문링크>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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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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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 전쟁을 하려면 보급은 얼마나 인원이 필요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재미있는 질문 감사합니다.중세시대의 보급과 관련하여 찾아낸 자료를 알려드리겠습니다.-군대의 보급-산업혁명 이전의 보급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1. 약탈형 보급2. 민간업자 (상인, 중간업자 등)의 보급3. 징발형 보급이 세가지 보급 형태 중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통제가 원할한 형태의 국가는 주로 세 번째 형태 (징발형)의 보급이 주를 이루고, 비교적 병력 규모가 적고, 중앙집권화의 진행이 덜 된 국가들은 첫 번째와 두 번 째 형태의 보급이 주를 이룹니다. 두 번째 형태인 민간업자를 통한 보급은 중앙집권 국가 든 아니던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의 보급형 이기도 합니다. 현대 국가에서도 군수품의 많은 부분을 민간업체 (혹은 군수업체)에서 공급하는 형태를 보입니다.어쨋거나, 30년 전쟁 이전(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유럽군의 보급은 주로 약탈과 민간업자의 보급에 의존하는 형태를 보입니다. 약탈에 의존하는 보급은 군대가 지나가는 지역이 초토화 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나, 군 사령관의 입장에서 보면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없을 뿐더러, 짭짭할 부수익(약탈품)으로 군대운용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약탈형 보급의 또 다른 약점이라면, 약탈에 의지하는 군대는 대규모의 병력운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군대가 한 지역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민간업자가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방식은 중세 뿐만 아니라 근대에 와서도 널리 활용된 방식인데 이 경우 대게 상인들이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등을 타 지방이나 주위에서 구입한 다음, 군대에 판매했습니다. 대규모 군대 (수만명 급의) 에 상인을 통해 식량을 보급할 경우에는 대게 국왕이 전쟁기간 (혹은 전시 초기)에 모든 식량의 판매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내리고, 상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상인들이 공급하는 방식은 국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급체계의 유지에 필요한 관료조직을 운용하지 않아도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의 동원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 만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운용하기에는 힘들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징발을 통한 보급방식은 중세유럽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은 방법이나 근대유럽 및 중, 근대 중국 에서 많이 쓰인 방식입니다. 이 경우 국가가 방대한 양의 보급품을 징발할 수 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의 유지, 보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효율적인 징발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 방대한 규모의 관료제도가 필요하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징발제도는 보통 전쟁터에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서 식량을 모은다음 지방관의 관할 하에 보급품을 군대로 보냈습니다. 중세 영국의 경우 각 주를 담당하는 주장관이 그 지역에 할당된 보급품을 전쟁터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임무를 총괄하는 임무는 주로 학문이 뛰어난 고위 성직자들이 맞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근대유럽에서 이 보급품을 징발하는 사람들은 각 지역의 행정관들이 총괄했습니다. 예를 들어, 국왕의 재무장관 (혹은 군 보급의 책임자)이 A 라는 지역에 3000석의 식량을 B 지역까지 집결시키라고 했다고 하면, A 지역의 행정관은 3000석의 식량을 책임지고 B 지역까지 운반했습니다. <https://m.cafe.daum.net/Ritter/1g22/10 원본 링크> 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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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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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으로 갔었던 조선통신사 2명의 말은 왜 달랐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료를 찾아보니 같이 일본을 다녀왔음에도 다른 보고를 했던 이유는 둘 사이의 관계 때문 이었습니다.병화는 있을 것이다 라고 한 황윤길과 병화는 없다고 한 김성일.똑같이 일본을 다녀왔고 일본의 정황을 정찰하고 왔는데 전혀 다른 보고를 한 것이다.도대체 왜?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황윤길이 겁에 질려 비굴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분노에 황윤길과 다른 보고를 했다고 전한다.이 말이 사실이라면 김성일은 국가 중대사에 개인적 감정을 개입한 꼴이 된다.그정도 졸장부 였을까?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출장 내용이다선조 23년 4월 29일 통신사 일행이 다대포를 출발하여 대마도에 5월 4일 도착하였다.당시 통신사 관련 기록들을 보면 황윤길과 김성일은 매사에 충돌한다.김성일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으로써의 당당함을 유지하려 한 반면 황윤길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애쓰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부분에서 둘은 충돌한 것이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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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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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패스트푸드가 설렁탕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패스트푸드는 롯데리아 라고 생각합니다.1979년 10월 25일 소공동에 롯데리아가 열린 날이 보통 우리나라에 최초로 패스트푸드가 시작된 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설렁탕의 경우는 영어에서 정의하는 패스트푸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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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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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4가 나쁘다는 인식은 언제부터 생겼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사람이 4를 싫어하게 된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국가보훈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일제잔재 뿌리뽑기 캠페인’에서 4를 죽음과 연관시키는 현상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생겼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어에서 4는 ‘시’로 읽히는데 죽을 사(死)의 발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4에 대한 공포증이 우리나라에 퍼지더니 6.25전쟁을 겪으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쳐 우리나라에서도 4는 불길한 숫자가 됐습니다.도움이 되셨으면 추천 및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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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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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원지간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겼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견원지관, 개와 원숭이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서유기에서 유래한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이랑진군이라는 자가 개들을 데리고 천계의 골칫거리인 손오공을 잡으러 수렴동에 가서 개들을 풀어 손오공의 부하 원숭이들을 공격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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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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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드 뭉크는 '절규' 작품을 왜 여러 점을 그린 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해설을 하고 있는 김찬우 입니다.아시다시피 파스텔로만 그린 2점, 템페라, 유채 파스텔을 함께 사용한 2점 총 4점이 있습니다하지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석판화도 있습니다.이렇게 다양한 버전으로 남긴 이유는 사실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는 사료는 없습니다.하지만 보통의 작가들이 특정 작품을 모방하거나 자기 작품을 재생산 하거나 명화로 부터 모티브를 가져 오는 건 과거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재생산과 모방의 이유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작업의 일한이었습니다.하지만 뭉크의 절규는 재료만 틀렸지 구도 및 형태는 동일하였기에 위의 모방과 재생산과는 틀려 보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저의 의견입니다만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일기를 참고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나는 두친구와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우울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멈춰서서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극도로 피곤해져서 불타는 구름이 피와 칼과 같은 형태로 짙은 푸른색의 피요르드와 도시위에 걸려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친구들은 계속 걸었다. 나는 그대로 서있었다. 불안으로 몸을 떨며 그 순간 거대한 무한한 비명이 자연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비극적인 삶을 살아오면서 정신질환을 앓은 것으로 알려져있는 뭉크였기에 해당 작품을 반복적으로 그린 이유는 정신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동일한 작품을 한번도 남긴적이 없던 그가 2년에 걸쳐 5번이나 동일한 주제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적으로 재생산 한 것은 정신질환자의 충동과 집착과 연관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명쾌한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오랜만에 뭉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며 오슬로로 날아가서 해당 작품을 직접보고 싶단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그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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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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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도 삼국지처럼 전략가들이 존재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지를 읽고나면 우리나라에는 그들과 같은 영웅은 없을까 란 궁금증이 생기곤 합니다.역사를 바탕으로 하나 소설로 각색된 삼국지는 특히나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한국에는 제갈공명이나 방통같은 전략가가 있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명장들이 있습니다대표적인 9명을 꼽아보자면광개토대왕 : 동북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한국사 최고의 정복왕김유신 : 화랑정신으로 삼국을 통일계백 : 백제의 마지막 명장. 황산벌의 영웅척준경 : 고려시대의 소드마스터로 불린 여진족을 상대로 뛰어낸 무술 실력을 선보인 고려시대의 무장이성계 : 신궁이라 불린 조선의 건국왕이순신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조선바다의 수호신김시민 : 진주대첩에서 활약한 심리전의 달인.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활약한 명장김좌진 :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장군이세영 : 한국전쟁에서 하늘을 지킨 6.25 전쟁의 영웅이 정도면 삼국지의 영웅들에 비할만 하겠죠?ㅎㅎ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를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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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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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을 왜 위원장이라고 칭하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에서 이렇게 불립니다."조선로동당 위원장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북한은 당, 정부, 군대 순으로 중요도를 매기지만, 우리 정부는 두번째 직함인 국무위원장으로 부르겠다는 건데요. 이는 정부 수반을 뜻합니다. 지난 1, 2차 남북정상회담 때도 우리는 김정일의 호칭을 정부 수반을 뜻하는 국방위원장으로 불렀습니다여러 호칭이 있지만 위원장이 조선 로동당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둘다 대표할 수 있는 직함이기에 위원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와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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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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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옛부터 생선회를 먹었나요? 아니면 일제시대 때 들어온 식문화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관련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 중기 이후 부터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우리나라의 경우 생선회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근거는 17세기초 조선조 숙종때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 나옵니다. 껍질을 벗기고 살을 얇게 썰어 얇은 천으로 물기를 닦아낸 다음 생강이나 파를 생선회 접시 위에 올려 곁들여 먹고 양념으로 겨자를 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얼음 위에 올려 먹는등 생선회 문화가 오늘날과 다름없을 정도로 발달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며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와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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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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