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건국신화에서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천부인은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니요. 애초에 너무 오래된 물건이라 천부인이 뭐 어떻게 생겼고 누가 어떻게 쓴것인지조차 전해지지 않습니다.국내에는 최남선이 주장한 청동으로된 검,거울, 방울 설이 제일 유명하지만이건 고조선이 제정일치 사회에 샤머니즘 문화권이기 때문에 그럴것이다 라는 추측일 뿐이죠그것도 일본 황실의 삼종신기 배낀거라 일제시대때 친일프로파간다 용으로 써먹혀서현대 학계에선 반쯤 무시되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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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사에는 정사와 야사가 있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사는 정부에 발표한 역사야사는 산야(山野)에 있으면서 기록한 역사라는 뜻입니다. 민간인이 쓴거란거죠동아시아 권에선 역사서 편찬은 제대로된 왕이면 한두면 해야하는 의무였기 때문에이런식의 역사기록 구분이 있었던 거에요정사쪽은 왕의 명령으로 만들어 진 것이니 당연히 그 왕에게 유리한 식으로 편집되었지만국가적 사업인만큼 자본도 자료도 풍부해서 정확도가 높구요야사는 보통은 기록되지 않거나 무시될 부분또한 기록할 수 있지만민간인이 맘대로 쓴거라서 자료마다 수준 차이가 매우 심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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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상 위에 있는 INRI의 뜻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라틴어: IESVS·NAZARENVS·REX·IVDÆORVM의 약자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라는 뜻입니다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때 사형당한 이유로 십자가 위에 적혀 있었다고 전해지는 문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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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우리도 인공땅굴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미 있는 땅굴에서 게릴라 전을 하는 정도라면 모를까땅굴을 만드는건 성공하기 힘든 전술이기 때문에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큰 굴을 파는건 들키기 너무 쉬워요사람도 많이 써야 하고, 퍼낸 흙은 어디로 옮길 것이며잘못 파서 물이 들어와서 수장당하거나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전쟁 도중에 땅을 파는 병력을 따로 빼는건 진짜 여유롭거나그거 아니면 답이 없을때 하는 도박인 겁니다. 그래서 남침용 땅굴들도다 휴전 후에 만들어졌구요특히 현대에선 땅굴에 폭탄 한두개만 터트려도 다 죽으니까요혹시 참호를 땅굴이랑 헷갈리신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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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국밥이 흥행한건 왜일까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록적으로 따지면 ,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유순(1441~1517)이 지은 오언고시인 십삼산도중(十三山途中)에 국밥, 즉 탕반(湯飯)이 언급 되는게 최초입니다만일단 그 전 부터 밥을 국에 말아먹는 것 자체는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아예 그렇게 준비된 하나의 메뉴로써의 국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단 거죠조선은 여러 여건상 화폐전파가 거의 불가능해서수도권을 제외하면 조선 중기까지 쌀로 물물교환 하는게 대세였고쌀은 여행 필수품이니 음식점이란게 없거나 있어도 국,반찬만 팔았었는데요 상공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부터 주막이 발달하면서쌀을 쓰는 음식들이 생기기 시작 했고그 중에서 제일 만들기 쉽고 든든한 메뉴가묵은 밥에 탕을 부어서 만드는 국밥 이었던 겁니다.토렴같은 기술을 이용하면 아무리 오래된 밥이어도 따끈따끈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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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이 2번이나 백의 종군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것 보다 한참전, 육군이던 시절에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현대식으로 말해서 북방경비대+대민지원 책임자로 일했었는대그때 여진족의 공격으로 담당지역이 큰 피해를 입어서 벌을 받았습니다.당시 이순신의 상관이었던 함경도 북병사 이일이 증원요청을 무시했었는데책임을 회피하려고 전부 이순신때문이라며 사형까지 주장했지만선조가 말려서 사형은 피했었죠.이런 과거가 있으니 이순신장군님이 끝까지 싸웠던게 아닌가 하는 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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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축구는 럭비에서 파생된 스포츠게임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럭비에서 파생된 것이 맞습니다만미국은 영국에서 독립 했다는 것이 자긍심의 뿌리이기 때문에니들 축구 영국 럭비에서 나온거지? 라고 하면 싫어합니다다른점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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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유대인 중동분이신데 어찌 백인의 그림들이 돌아다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인의 얼굴이 학계의 지식과 정반대로 알려지는건 흔한 일입니다한국만 해도 단군 초상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위인 얼굴이박정희 독재정권이 자기들 맘대로 근거도 없이 그린 것 이죠유전자 검사는 커녕 사진도 없는 고대인물의 초상화라면남아있기도 힘들지만, 남아 있더라도 왜곡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도 하구요불교가 원산지인 인도보다 동아시에서 더 융성한 것 처럼기독교 또한 원산지인 중동 보다는 유럽지방에서 더 성공했으며어차피 예수님 초상화나 그런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그냥 자기들 상상대로 예수님 모습을 만들어낸 겁니다.그리고 비행기는 커녕 자전거도 없던 고대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은자기와 다른 인종은 보기는 커녕 소문도 들은 적 없으니예수님 또한 자연스럽게 유럽적인 모습이 된 거구요.보지도 듣지도 못한걸 사람얼굴이라고 주장할 순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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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을 가면 공항에서 지문과 사진을 등록하고 검색대를 통과 하는데요. 지문을 등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모든 국민의 지문을 등록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민주주의 국가중에선 진짜 유일하죠.이런 한국도 인권문제로 2003년에 외국인 지문 수집을 그만 뒀는데 일본은 왜 아직도 그러냐면....딱히 알려진건 없습니다.일단 테러방지니 인구 관리니 뭐니 하고 있긴 한데먼저 그만둔 한국의 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범죄율이랑 지문은 별 상관 없고9.11테러 이후 비슷한 짓을 했던 미국의 관광산업과 외교가 엄청난 타격을 받은걸 생각하면참 이상한 행동이죠일단 관련 이야기를 좀 하자면대부분 나라에서 지문은 범죄자것만 따로 보관하는데1952년에 일본이 외국인등록법을 만들면서 제14조는 일본에 1년 이상 재류하는 한국인이 거주등록을 할 때 반드시 지문을 날인하도록 의무화했었습니다당연히 한국인은 다 범죄자 취급이냐면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1980년대엔 아예 각잡고 지문날인 거부운동이 일어나서3년마다 한번->5년마다 한번->1987년 폐지 되었었는데2007년에 부활 시켰습니다.이때도 반발이 심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아직도 유지되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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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을 위한 대부업체같은 게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물론 있었습니다. 고려 중기부터 농장에서 장리(長利)라 하여 10두에 3두 내지 5두의 고리대금업을 했단 기록이 있고.사채란 단어자체가 고려시대에 생긴 거에요 공공기관의 빚(채)인 공채가 아니라개인끼리 사적인 빚(채)만들어서 사채인거죠조선의 대출 제도는 급채(給債) 방채(放債) 흥리(興利) 식리(殖利) 등등 다양하게 있었다고 전해지며대출이자를 ‘이식(利息)’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불렀다고 합니다대출 알선 전문가인 흥리인 또는 식리인 이란 전문직업도 있었다고 하죠조선은 거의 대출 왕국이라 승려, 사대부 서얼 가릴 것 없이 어느 계층이나 대출업을 했었다고 전해집니다금융업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 이자도 맘대로고 추금도 맘대로 인데체면이라도 걱정해야 하는 공채완 다르게 사채는 아예 검계같은 불법 조폭들이 관리해서빌렸다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염왕채(염라대왕사채)라고 불렸다고 하고사채업자들이 날뛰어서 걱정이란 기록이 가끔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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