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사출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부여는 5부족 연맹 왕국이었습니다. 중앙은 왕이 다스리나 각지는 4구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을 마가, 우가, 저가, 구가의 군장인 '가'들이 자체적으로 다스립니다. 가축을 이름을 딴 부족장의 세력으로 당시 부여가 목축을 기반을 한 반영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왕이 다스리는 도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은 주요 도로를 출도라 하는데, 4지역을 사출도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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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나요?
한국사 시대 구분에서 조선 전기를 근세, 조선 후기를 근대의 태동기라 합니다. 즉 조선 후기는 이미 근대적 요소를 가진 시대로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조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실용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정조는 정치적으로 탕평책을 통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신해통공을 시행하여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의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상업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5군영이 부패를 바로잡았으며,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영을 배치했습니다. 문화적으로 실학파를 육성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얼허통을 통해 서얼 출신들을 등용하였는데, 이는 평등한 시민사회로 이행을 의미합니다. 전형적인 서구화, 즉 근대화는 아니지만 정조는 자체적으로 근대적 모습을 갖춰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군왕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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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샤머니즘이란 무엇인가요?
선사시대의 샤마니즘은 자연과 영혼 세계를 연결하는 원시신앙입니다. 샤먼은 신과 영혼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원시 인간들이 샤먼을 믿은 것은 샤냥 실패, 기근, 죽음, 등 예측 불가능한 자연에 대한 공포에서 심리적 안정을 위해 샤먼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샤먼을 통해 부족의 통합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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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전염병은 인류 문명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역사 속 대규모 전염병으로 14세기 흑사병이 있습니다. 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의 1/3 이상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흑사병의 유행은 농노의 노동 가치를 상승시켜 장원제의 붕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농민들이 자유 이동, 임금 협상으로 농노 의 노동 지대를 바탕으로 하는 장원을 약화시켰으며, 결국 중세의 기반인 봉건제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고, 도시 자유민의 증가시켰으며, 교회 권위를 추락시켜 종교 개혁의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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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다모'란 직책은 어떻게 선발했나요?
본래 조선시대 다모는 관청에서 차, 식사 대접 등의 일을 하는 여자 관노비를 말합니다. 의녀 선발 시험에서 3번 낙방하면 다로모 강제 전환되고, 빈민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자진하기도 하지만 지방 수령 추천이나 양반 가문의 여종 가운데 매입하여 다모가 되기도 합니다. 드라마에서 다모가 형사 업무를 하는 경우는 포도청에 배치된 다모가 여성 피의자 몸수색, 규방이나 여인들의 수색 등 여성 관련 업무를 수행합니다.관비 신분은 천민으로 세습되지만, 다모 역할이 세습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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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는 권력으로 따지면 어느정도 수준이라 할 수 있나요?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왕의 특명사신으로 정 3품~종2품의 수준 높은 직급에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관찰사가 종2품이라 같은 품계의 지위로 상당히 높은 지위입니다. 조신시대 사헌부의 대사헌, 사간원의 대사간이 정 3품이니 매우 높은 직위로 오늘날로 보면 정부 행정부처의 차관급에 해당됩니다.왕이 신뢰하는 젊고 충직한 당하관을 비빌리에 선발하여 극비리에 임무를 하명하여 수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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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수학자들은 시험이 없이 관료로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나요?
조선시대 수학자들은 잡과 과거와 취재 등으로 관직에 등용되었습니다. 잡과는 세종 12년(1430)에 사역원 산사 채용을 시작으로 기술관을 선발하기 위한 시행된 과거 시험입니다. 그리고 취재는 과거와 별개로 특별 시험으로 <상명산법>, <양휘산법>, <산학계몽> 등 간단한 실무 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하급 산원, 산사를 선발하는 절차입니다. 이는 기술관 선발 시험에 통용되었습니다. 즉 과거처럼 문학 중시가 아닌 실기, 실무 중심으로 선발했습니다.그외에도 음서, 천거 등을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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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정치는 어쩌다가 심해지게 되나요?
사람은 사화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향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선조 때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사림들은 학연, 사상, 인사권 등을 놓고 자신들 패권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1575년 외척 정치 잔재 청산 이견과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중심으로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세자책봉,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고 1680년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는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권을 놓고 학파적 성향에 따라 붕당의 분화가 촉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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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송씨가 해평부원군 정미수를 양자로 삼은 게 맞나요?
정순왕후는 조선 6대 단종의 왕비로 해평부원군 정미수를 시양자로 삼은 것은 사실입니다. 정미수는 문종의 장녀이며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로 정순왕후의 외질입니다. 단종의 사사 이후 홀로 정순왕후가 자녀가 없이 살아야 하는 처지에 노후 봉양과 왕실 혈통 보존 의도로 성종에게 정미수를 시양자로 삼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정미수의 후손이 단종, 정순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은 시양자 관계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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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키는 작았다는 이야기 실제 역사에서는 아니었다던데 정말인가요?
나폴레옹의 키는 프랑스 단위로 5피에 2푸스로 이는 약 168~170Cm에 해당합니다. 당시 프랑스인의 평균키가 162~164cm와 비교하면 더 컸습니다.나폴레옹이 키가 작았다는 것은 당시 190cm 근위대가 항상 나폴레옹을 호위하여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 것이고, 영국이 나폴레옹의 키를 조롱하면서 왜곡하여 풍자한 것이 퍼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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