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강동 6주에 대해 궁금합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993년 고려의 서희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해 차지한 지역으로 강동 6주의 위치는 흥화, 용주, 통주, 철주, 구주, 곽주 등 압록강 하류와 청천강 중간지역으로 현재의 평안도 지역입니다.강동 6주를 차지한 후 청천강에서 영흥이었던 고려의 국경선이 압록가에서 영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유적지 뭐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유물로는 석굴암, 삼능, 동궁과 월지, 첨성대, 석굴암, 천룡사 등이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서양이나 동양에서 수은을 아주 오랫동안 생활에 밀접하게 활용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거 수은광을 약재로 썼고 진시황이 불로불사를 위해 이것을 먹었습니다. 수은이 보기에 대단히 화려해보이는 액체라 진시황 말고도 고대 귀족들이 귀한 물건으로 여겼고 한의학에서 명약으로 취급되기도했습니다.중세 연금술에서 완전한 금속으로 취급,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변화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수은을 불로불사의 영약으로 받아들이고 복용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뉴턴이나 보일의 법칙을 발명한 보일이러한 과학자들은 왜 수은에 심취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주변에서 쉽게 접할수있는 금속 중 특이하게 상온에서 액체인데다 아말감을 형성하는 특이점으로 연금술사들은 금속의 첫번째 형태라는 식으로 의미있는 물질로 여겼습니다. 또 가열시 산화와 환원을 스스로 반복하기때문에 불사조로 상징, 이는 연금술의 핵심 중 하나였습니다.
학문 /
철학
23.11.19
0
0
일본이나 한국에선 고래고기를 어느시기부터 먹었고 어떤식으로 즐겼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울산광역시 울주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져있는 고래잡이 그림이나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래뼈 유물등으로 보아 고개고기 식용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시대 문헌에 고래 표착이나 고래기름 기록이 일부 전해지고, 고래잡이는 19세기 말 본격화 되었습니다.일본의 고래잡이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이루어졌고 서양의 고래잡이와 달리 단독적인 고래잡이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에도시대에는 시구라쿠미라는 대규모 고래잡이 집단에 의한 조직적인 포경을 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신라시대에는 성골끼리 혼인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시대의 골품제도에서 혼인은 원칙적으로 같은 신분안에서만 혼인이 허가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신라시대에 그린 그림중 현재에도 보존되어 있는게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시대 만들어진 초상화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선사암에 있는 도선의 영정, 최치원의 영정, 경순왕의 어진이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신라시대 토지제도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687년 관료전을 사급하는 제도가 실시되었고, 689년 내관, 외관의 녹읍을 혁파해 사조유차하게 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으며 이 녹음은 757년 이르러 다시 부활, 이에 앞서 722년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는 정전제도가 실시됩니다.녹읍과 관료전은 수조권을 지급하는 토지제도이나 이 토지의 소유권을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에 따라 이 둘의 차이가 갈립니다.녹읍은 수조권 뿐 아니라 그 토지에 대한 지배권조차 지급한 것으로 그 땅에서 나온 세금과 그 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할수있었고 그 땅의 소유권은 죽어서도 인정되어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됩니다.관료전은 수조권만을 지급하고 지배권은 인정하지 않으며 관직에서 물러나면 관료전을 반납합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고려말기에 온건파와 급진파의 주장에 대해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온건파는 김홍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청나라의 양무운동을보며 토대로 만들었습니다.유교 질서를 따르고자 하며 서양의 문화보다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개화를 이루고자 했습니다.급진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며 빠르게 조선의 개혁을 추구합니다.일본 메이지유신을 바탕으로, 조선 발전의 토대로 삼았고 서양의 과학기술만 받아들이는 온건 개화파와 다르게 서양 과학기술과 당시 서양 사람들의 사상이나 제도까지 받아들이고자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조선에서 법의학은 상당히 체계가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법의학서로 유용하게 읽힌 것은 무원록으로 원래 중국 원나라때 왕여라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15세기 초 세종이 우리 실정에 맞게 다듬고 주석을 달게 해 새롭게 신주무원록으로 고칩니다. 18세기 말 영조가 이를 또 보완해 증수무원록으로 내놓았습니다검시 방법으로 부검을 하지 않는 대신 시신의 상태나 주변 정황을 살피는데 예를 들어 얼굴색도 진한 붉음, 검붉음, 누렇게 붉음, 시퍼렇게 붉음 , 창백하게 붉음, 연하게 붉음 등 여러 가지 경우로 나누어 기록, 만약 목이 졸려 죽은 자라면 정맥만 막히므로 피가 머리쪽으로 몰려 얼굴색이 검불게 되는데 이 경우 설령 목을 매달아 자살한 듯 꾸며도 타살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검시 기술이 색에 의존하다보니 범인들은 살해 흔적을 위장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흉기로 구타 후 살해한 뒤 푸르거나 붉은 색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꼭두서니 풀을 식초에 담궜다가 상처에 발라 상흔을 제거했습니다.이에 대해 조선의 법의학서적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상흔이 의심스러우면 사또는 반드시 감초즙으로 해당 부위를 닦도록 하라. 진짜 상처가 있었다면 즉시 나타날 것이다. 라 합니다. 이는 경험으로 알게 된 산과 알칼리의 중화 반응을 활용한 것입니다.독극물 검사법으로는 유황이나 비소 등은 은과 반응해 검은 막을 형성, 이 원리를 이용해 은비녀를 죽은 자의 구강과 식도에 밀어 넣어 색이 변하는지 관찰해 독살인지 아닌지를 감별했고, 이 방법으로 확인이 잘 안될때 밥 한 숟가락을 죽은 자의 입이나 식도에 넣고 종이로 봉해 두었는데 이는 나중에 밥을 꺼내 닭에게 먹여봐 죽으면 이 역시 독사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물에서 발견된 시신이 정말 익사인지 알아보는 방법으로는 입과 코에서 하얀 물거품이 나오지 않는다면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익사한 사람은 급하게 호흡을 하려다 물을 들이마시게 되는데 이때 기관지에 남아있던 공기와 점액이 물과 섞여 자잘한 흰 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불에 탄 시신의 경우 입과 코 안에 재나 그을음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조선시대의 법의학 지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내용들이 있으나, 부정확한 지식들도 많았습니다. 친자감별법이나 처녀성의 판단법 등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경우도 많으며 사람이 이빨로 물면 독이 스며든다고 본 것도 2차 감염 현상과 혼동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학문 /
역사
23.11.19
0
0
244
245
246
247
248
249
250
251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