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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여름날 삼계탕을 먹게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조선시대때 복날에 서민은 개고기를 넣은 개장국, 양반은 주로 소고기를 넣은 육개장을 먹었다고 하며 , 닭백숙은 삼국시대부터 먹었으며 고기가 귀했던 시절 가정에서 그나마 자주 해먹었던 고기 요리 였습니다.일제강점기 때 여러 부잣집들에서 백숙이나 닭국물에 인삼가루를 넣어 만든 것이 오늘날 삼계탕의 시초이며 1950년대 계삼탕을 파는 식당이 생겨나고 6.25전쟁 이후 1960년대 삼계탕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1960년대 들어 냉장고가 보급되며 유통방식이 개선되어 인삼을 오래 보관 할 수 있게 되자 삼계탕에 인삼가루를 넣는 식이 아닌 말린 인삼을 넣는 식으로 요리 형태가 바뀌고 이에 따라 이름도 바뀌면서 지금의 삼계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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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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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성 최초 장군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수영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누이 동생으로 그녀가 고-당전쟁에 참여했꼬 그녀의 사당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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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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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화폐의 종류로 종이를 사용하기 시작한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최초의 지폐는 중국 송나라의 교자 입니다. 10세기 말경 동의 부족을 막기 위해 쓰촨 등지에서 철화를 대신해 임시 용도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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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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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연호는 언제부터 사용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락은 391~412년 총 21년간 사용되었습니다.414년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는 물론 408년 건립된 덕흥리 고분에도 나오는데 광개토왕비 등 관련 기록에 최초라는 언급이 없어 고구려에서 최초로 사용한 연호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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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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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볼 때 주의해야할 점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 관객들의 시야와 청각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스트레칭, 헛기침 등은 넘버가 끝난 후 박수 타이밍, 장면이 전환될때 하는 관객이 많습니다.-사전에 허가되지 않은 촬영 또는 녹음-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보는 행위-비어있는 앞자리로 옮겨앉는 행위-휴대전화 및 스마트워치 사용-물을 제외한 음식물 섭취-냄새를 풍기는 행위-주변 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행위-잡담이나 감상을 나누거나 커플끼리 애정행각을 하는 등 소음을 유발하는 행위-좌석에서 다리 떠는 행위 -앞좌석을 발로 차거나 건드는 행위- 타인의 시야나 청각이나 감정 등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커튼콜 시 기립박수를 제지하는 행위-커튼콜 시 기립하지 않았다고 눈치주는 행위 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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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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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24시간으로 구성이된것은 어느시대부터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가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게 된 것은 이집트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원래 하루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10시간을 낮, 밤의 시간을 밤에 별의 지속적인 움직임을 관찰해 12시간으로 했으며 이를 데칸이라 합니다 . 그리고 황혼의 시간을 2시간으로 정했습니다.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하루가 24시간임을 도입한 사람은 그리스 천문학자 히파르코스였습니다.기원전 2세기 천문학자 히파르코스는 행성이 끊임없이 회전하는 방식을 연구하여 결국 춘분의 축 전진운동을 찾았고 횡성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춘분을 사용하여 낮의 12시간과 밤의 12시간을 균등한 간격으로 재어 배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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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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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백정은 왜 천한 취급을 받았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평민 하류에 속해 천민인 노비보다 사회적 인식이 나빴으며 조선 전기 중대한 사회문제로 취급받았습니다.조정에서는 어떻게든 이들을 일반 백성과 동화시키려 했지만 유랑생활과 수렵에 익숙하던 그들은 칼을 쓰는데 일가견이 있고 말도 잘 탔기 때문에 조선에서 걸핏하면 산적으로 위장해 농민들을 약탈하고, 관가까지 털었으며 조정이 추진한 양민들과 통혼과 동화는 양민들 뿐 아니라 백정들도 거부했습니다. 백정은 강도들을 잡으면 다 백정, 살인범의 절반은 백정, 가축 훔친 흔적을 조사면 백정 마을,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 등 의 수준이었고 백정 마적단의 난리는 세종, 문종, 세조 내내 골칫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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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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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실존했던 사람인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군은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일종의 신화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대한 기록의 대다수는 신화적 성격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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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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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구려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이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뭐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에 대하여 중국은 고구려가 독립된 고대 국가가 아닌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을 조공 책봉 관계를 맺은 중국의 신하국이었다고 주장합니다.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의 수당전쟁도 국제전이 아닌 내전이고 고구려인의 종족적 기원은 한인의 요소를 가졌다고 말하며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은 대부분 당나라로 유입되어 한족과 동화되었고 이후 건국된 고려는 고구려와 연관성이 없다 주장합니다.그러나 이러한 중국 측의 주장에 모순점이 존재하는데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점에 대해 다양한 사료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중국의 역사서 속 고구려가 이역열전에 기록되어있는 점으로 이역열전이란 중구이 외국에 대한 기록을 담은 것으로 해당 부분에 기록된다는 것 자체가 중국이 고구려를 외국으로 인식했다는 의미가 됩니다.이는 중국의 조공책봉 관계로 인한 신하국 주장과도 연결되는데 조공책봉이라는 것은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의미하며 이는 국가간의 외교적인 관계를 수립한 것이지 신하 혹은 국가의 지방정권이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또 고구려인들의 종족은 한족이 아닌 부여 계통의 예맥족으로 이는 부여의 기원과 주몽이 부여인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됩니다.마지막으로 고구려 멸망 후 , 대부분의 유민은 통일신라나 발해로 유입되었고 일정수의 사람들이 당으로 이주하기는 했으나 이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강제적인 이주였습니다.수적으로도 고구려의 인구가 대략 300만이었는데 당으로 유입된 인구는 고작 20만이었으니 대부분이 당나라로 이주했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게다가 신라 이후 건국 된 고려는 뚜렷하게 고구려의 계승의지를 표방했는데 이는 무엇보다 국호에서 드러나며, 고구려는 국호인 고구려 외에도 종종 스스로를 고려 라 칭하기도 했고 고려라는 국가 국호가 이러한 고구려 계승이라는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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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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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령왕과 성왕의 업적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령왕은 백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 전남 쪽의 잔여 마한 세력을 일소하고 가야를 압박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 중국 남조의 양과 외교 관계 강화 등이 있습니다.성왕은 백제 26대 왕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했으며 ,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북진을 했으며, 한강 하류 6군을 회복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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