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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직전에 왜 조선은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도 일본과 전쟁을 했습니다. 다만 화력이 약했을 뿐입니다.일본이 동학동민운동을 구실로 조선 경복궁을 점령 할 때도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한때는 일본군이 밀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농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지요동학 농민 운동군이 죽창, 화승총을 들고 올라오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입니다.하지만 화력면에서 차이가 컸던 동학농민군이 괘멸하고 이 전투로 조선의 마지막희망이 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 1907년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마지막 불씨를 살려보려 노력하였고11월부터 서울 진격을 목표로 설정하고 진격을 개시해 경기 일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08년 1월 말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통수권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떠났습니다.제2대 총대장이 된 허위는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했으나 화력의 부족과 일본군에게 의병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아 결국 연합의병의 서울탈환작전의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13도창의군은 완전 해산해 각기의 연고지로 돌아가 독자적인 의병활동으로 환원하였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항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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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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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백일홍은 꽃입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백일초라고도 한다. 높이 60∼90cm이다. 잎은 마주나고 달걀 모양이며 잎자루가 없고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털이 나서 거칠다. 끝이 뾰족하며 밑은 심장 모양이다. 꽃은 6∼10월에 피고 두화(頭花)는 긴 꽃줄기 끝에 1개씩 달린다. 꽃은 지름 5∼15cm이고 빛깔은 노란색, 자주색, 흰색 등 여러 가지이다.총포조각은 둥글고 끝이 둔하며 윗가장자리가 검은색이다. 종자로 번식하며 품종은 주로 꽃의 크기에 따라서 대륜(大輪)·중륜·소륜으로 나눈다. 열매는 수과로서 9월에 익는다. 씨를 심어 번식한다.멕시코 원산의 귀화식물이며 관상용으로 널리 재배한다. 백일홍이란 꽃이 100일 동안 붉게 핀다는 뜻이다. 꽃말(흰꽃)은 ‘순결’이다. 백일홍은 원래 잡초였으나 여러 화훼가들이 개량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들꽃을 개량한 본보기의 하나이다. 배롱나무의 꽃을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다른 식물이다.
학문 /
미술
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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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시각장애인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세종께서는 나이가 들어 당뇨가 있으셨고 당뇨의 영향으로 눈이 흐려 지셨다는 기록이있습니다. 완전히 실명한 것은 아니고 많이침침해 지셨던 것 같습니다.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학문 /
미술
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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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혹시 조선때 이몽학의난? 에 대해 아시는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 비참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는 명(明)·일(日) 사이에 강화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의 논쟁이 치열하였습니다.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자 확대되어가는 민중의 원성과 고통은 현실 여건과 타협될 수 없는 사회 모순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포착해 이몽학은 불평불만에 가득 찬 민중을 선동, 반란을 획책한 것이었습니다.이몽학은 본래 왕실의 서얼(庶孽)출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휘하에서 활동하였습니다.그는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한현과 함께 홍산(鴻山 : 지금의 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를 조련(操鍊)하였습니다.한현은 선봉장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어사 이시발(李時發)의 휘하에 있으면서 호서 지방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소홀함을 알아차리고 이몽학과 함께 시리(時利)에 편승해서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이 때 한현은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洪州 : 지금의 홍성)로 내려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사할 것을 이르고 자신은 내포(內浦)로부터 상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사의 성패만을 관망하려 한 것이었습니다.이몽학은 김경창(金慶昌)·이구(李龜)·장후재(張後載), 도천사(道泉寺) 승려 능운(凌雲), 사노(私奴) 팽종(彭從) 등과 함께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주둔하니 승속군(僧俗軍)이 무려 600∼700명이었다. 1596년 7월 6일 이몽학 일당이 야음을 타고 홍산현을 습격해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붙잡았습니다.이어 임천군(林川郡)을 습격해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납치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반군에게 항복해 빌붙게 되었다. 7일에는 정산현(定山縣)을,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을 함락하니 정산현감 정대경(鄭大卿)과 청양현감 윤승서(尹承緖)는 도망하였습니다.9일에는 대흥군(大興郡)을 함락하니 군수 이질수(李質粹) 또한 산중으로 도주하였다가 간신히 적정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수령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해 항복하거나 도주하고 이민(吏民)들도 모두 반군에게 복종하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또한,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은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겁을 먹어, 수하인들이 무기를 적진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고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자 문서를 반란군에 전해주었습니다.서산군수 이충길(李忠吉)은 아우 3명을 반란군에게 몰래 통하게 하여 도와주었다. 이렇게 되자, 이몽학은 대흥을 함락한 같은 날에 홍주를 침범하게 되었습니다.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주관속(州官屬) 이희(李希)·신수(申壽)를 반군 진영에 보내어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어에 따른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얻는 한편,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을 기용, 많은 무사들을 모이게 하였습니다.체찰사종사관 신경행(辛景行)도 인근 수령에게 전령해 구원을 청했습니다. 수사 최호(崔湖)도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니 홍주성의 수성 계획은 완전히 갖추어졌습니다.반란군과 맞서 싸우는 동안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이 홍주로 향해 무량사에 이르렀고, 어사 이시발은 유구(維鳩)에, 중군(中軍) 이간(李侃)은 청양에 포진해 장차 홍주로 향하려는 군사의 위세를 떨쳤습니다.이몽학이 성의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덕산(德山)을 향해 달아나자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이때를 이용해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어 혼란시키면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습니다. 이때 한현은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홍가신의 진군으로 패주하다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은 33 명이며 외방에서 처형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연좌율(緣坐律)을 적용하게 되면 그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해 희생자를 가급적 줄였습니다. 이리하여 반란 주모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도들의 입에서 나온 의병장들의 무인사건(誣引事件)은 당시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김덕령(金德齡)·최담령(崔聃齡)·홍계남(洪季男)·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등이 무인되었다. 그 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당하거나 옥사하였다. 김덕령은 뒤에 신원되었으나 반란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난 처리가 끝난 뒤에도 늘어났습니다.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 책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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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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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오스트레일리아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 1946~)는 1975년 그의 저서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을 통해 동물 해방론을 제시하였습니다. 동물 해방론은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인정하고 동물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싱어는 도덕적 고려의 기준을 쾌고감수능력(快苦感受能力,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소유 여부로 보았는데,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에게도 도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동물 해방론은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공리주의를 철학적 근거로 삼았습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의 쾌락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조화시키려는 사상으로, 벤담은 모든 사람은 쾌락과 고통에 관한 이익에 대하여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싱어는 이러한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을 동물에게도 적용하여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이익이 고려되어야 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싱어는 또한 인간이 동물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은 마치 인종이나 성별을 근거로 비윤리적으로 차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는 동물이 사람과 같은 종(種)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종차별주의(種差別主義, speciesism)에 해당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종차별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동물실험과 육류산업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동물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역설하였습니다.이러한 동물 해방론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이 수단으로 취급되는 비도덕적 관행을 비판하고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를 금지하도록 촉구하는 범세계적인 운동을 촉발하였습니다.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이론이고 인간의 이기 때문에 동물이 고통 받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면살아 있는 동안 환경이라도 쾌적하게 해주고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고통만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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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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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은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입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습니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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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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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고유성과 특수성이 무엇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구려, 발해는 유목민족(거란, 말갈, 여진족을 지배)을 근간으로 두었고고려, 조선은 농경을 중요시 여기는 농경민족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 문화가 고려에 의해 통합되면서유목민족의 특성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까지 함경도 일대에 기마전술을 잘 이용하였고 상대적으로 무력이 상당하였습니다.하지만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는 농사를 지어 정착하였고 국제적인 교류가 적어 지면서 한반도 특유의 문화가 꽃 피우게되는 고유성과 특수성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유구한 문화 덕분에 지금도 세계에 K-문화 열풍이 불고 있는 것 같습니다.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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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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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했다는 건 신화인가요?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세계 고대의 국가 성립에 건국신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왕 또는 황제는 일반 백성들보다뛰어난 인물이었어야 백성들이 우러러 보았기 때문에그러한 허무맹랑한 다소 과장된 이야기가 나왔던 것입니다.난 너희와 틀려 이런 의미이지요. 그러니 건국신화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이해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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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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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때 유명했던 무사로는 누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때 잘 알려지진 않은 황진 장군이있습니다. 그는 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막아냈고 무술이 뛰어나 활 시위 한번에 왜군한명씩 목숨이 끊어 졌다고 합니다. 그가 추앙 받아야 하는 이유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여러차례 막아 낸 것입니다. 결국은 기력이 소진되셔서 그곳에서 목숨을 잃으셨고황진이 죽자 진주성은 더 못 버티고 함락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무공은 지금까지 회자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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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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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많은 왕중에 성왕에 대해 궁금해서 문의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성왕에 대한 내용입니다. 능력이 출중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로가 비참했습니다.그는 무령왕(武寧王)의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명농(明穠)이었다. 무령왕이 523년 5월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는 그를 평하여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하였다”고 적었습니다.즉위한 다음 해, 양나라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 받았다. 양나라와의 관계는 양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같은 해, 신라와도 수교하였습니다. 신라·일본과 연대를 꾀해 고구려에 대항하려 하는 백제의 전통적인 외교태세를 다시 굳게 했습니다. 그러나 뜻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529년, 고구려의 안장왕이 군사를 이끌고 직접 쳐들어 왔을 때는 2,000명의 군사를 잃은 적도 있습니다.성왕은 538년에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고친 것입니다.. 그곳에서 성왕은 백제의 고유한 문화를 꽃 피웁니다. 그전에는 고구려의 문화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이제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킵니다.성왕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554년, 신라와 관산성(충북 옥천군)에서 벌어진 싸움 도중 왕자 창(昌)이 고립되었습니다. 창은 성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위덕왕입니다. 성왕은 직접 사랑하는 왕자를 구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도중의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기습을 당했습니다. 왕은 현장에서 전사했고 재위 32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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