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정치적인 야망이 꽤 많았다고 하는데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에 경기도 여주에서 부친 민치록과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8세 때 부친이 타계한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감고당(感古堂)에 와서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집이었습니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타계하자, 조대비의 명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3년 뒤인 1866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의 역할에 의해 16세 때 왕비로 간택되었습니다.고종 즉위 이후 10년 동안은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년이 되면서 직접 정사를 보고자 하는 고종의 욕망과 이를 지지하는 척족 인물들과 재야의 여론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종과 왕비는 개화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안에서는 보수유생, 구식군대, 급진개화파, 동학농민군의 도전에 직면하였고, 밖으로는 청국의 강화된 내정간섭으로 국정이 표류하였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당시 궁중을 탈출했다가 환궁하였고, 갑신정변 당시는 기지를 발휘하여 거사를 무위에 그치게 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이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틈타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에 파병하여 경복궁을 침략, 조선 조정을 장악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중에 연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에 의해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통해 군주권 회복을 추구하였고, 조선 보호국화가 좌절된 일본정부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이처럼 내외의 격동 속에 고종을 적극 내조해 왔으나, 이로부터 한 달 여 뒤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살해하였습니다.사건 직후 일본 정계의 요인과 외교관, 기쿠치 겐죠[菊池謙讓] 등 언론인은 명성황후가 부패의 화신으로서 조선을 망친 ‘궁중의 암탉’이며,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범죄로 덮어 씌웠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흥선대원군의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궁궐에 도착해 보니 사건은 일단락된 뒤였다. 이 사건과 일본 군민은 무관하다’하였습니다. Japan Daily Mail 등 일본의 영자신문은 이 사건을 ‘중세의 야만왕조’인 조선 궁중의 암투에서 빚어진 것으로 호도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의 왜곡은 일제하에도 지속되었습니다.명성황후를 직접 대면했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의 부인 혹은 비숍 같은 영국인 여행가의 기록은 일본 측과 달리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 서술이 적지 않습니다. 명성황후는 궁중 여성으로서는 동양의 고전에 밝았고, 서양의 종교와 풍속, 정치와 의회제도, 여성의 교육과 지위 등에 관심이 지대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지적이고 개화된 궁중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유가적 소양과 서양의 문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왕실, 군주와 국가의 활로를 추구하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모’이자 근대형의 여성정치가로서 재평가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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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반대한 사람은 최만리 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최만리만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당시 조선은 중국을 사대하고 있었습니다. 속국까지는 아니지만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있었지요.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자신의 글자를 가지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의 세계관에서는 명나라만이 하늘을 관측 할 수 있고 글자를 가질 수 있고 중국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중국의 것을 도용하여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부정하고 한글을 만들면 조선에 국난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이를 경계하고반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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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정리 거자필반은 무슨의미 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불교용어에서 온 말입니다. 불교경전인 《유교경》에는 "세상은 모두 덧없는 것이니 만나면 반드시 이별이 있다(世皆無常, 會必有離)."라고 하였고, 《열반경(涅盤經)》에는 "흥성함이 있으면 반드시 쇠퇴함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夫盛必有衰, 合會有別離)."라는 말이 나옵니다.여기서 전하여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말로, 생명이 있는 것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뜻의 생자필멸(生者必滅)과 함께 어떤 일이나 인간관계에서의 무상함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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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소설 서유기는 어느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요?
안녕하세요. 차재우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당나라를 배경으로 했습니다. 삼장법사와 저팔계, 사오정과 인도까지 여행하는 소설이지요. 도중에 요괴도 물리치고요.재미있는 소설 이었습니다. 저도 세번 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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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창조론의 뒷바침되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창조론의 기반은 아무래도 성경이겠지요. 신을 믿는 것이고 그가 인간을 만들어 우리가 발전했다. 창조론과 진화론 어떤것이 옳은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밝히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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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4대문명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4대 문명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1. 황하 문명(중국)2. 메소포타미아 문명(중동)3. 나일강 문명(이집트)4. 인더스 문명(인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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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로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에도막부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고 봉건적인 사회였습니다. 메이지유신이후 왕정보고되면서 일본은 급속히 개혁을 시작합니다.일본도 서양에 지배 당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자국을 방어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국방비를 증액했고집중적으로 육성하고 그 후 어느정도 국내 방어가 가능해 진 후 외국과 전쟁을 벌이고 침략을 시작합니다.일본 근대시대는 1868년 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 까지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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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왜곡은 왜 멈출 줄 모르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국제사회는 아직까지도 힘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제국주의시대보다는 나아졌지만 세계는 군사력과 경제력 인구 등의 힘의 논리가 작용합니다. 우리가 우리 목소리를 내려면 더 강해져야 하고 강한 무기로 전쟁 억제력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는 되풀이 됨을 알아야 하고 강한 힘을 육성해야지만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낼수 있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논리적으로 안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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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고려보다 더 나은 세상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여러면으로 봐야 하지만 확실히 발전하였고 근대화 되기는 했습니다.성리학을 배웠던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초기 실리를 추구하고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종조때는세종이 황희를 강원도 지역으로 보내 지방 수령들의 잘못한 바를 바로 잡고 흉년시에도 백성들을 도와주는 제도도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다짐이 쇠퇴하고 고려말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대가 정조 사후 부터는펼쳐집니다. 오죽하면 민란의 시대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여성의 권리는 고려때가 더 있었고 조선시대에여성의 권위가 실추된것은 성리학의 영향 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집안 문화에 남자가 중심이었고 여자는 출가외인으로 취급하여 재산상속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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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우금령이 반포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조선왕조실록>에는 우금령(牛禁令)이 초대 조선 왕인 태조로부터 23대 순조에 이르기까지 22회 발령됐다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조선시대 우금령이란 말 그대로 소의 도축을 금지하라는 왕의 명령인데요.소의 도축을 금지하라고 왕이 지시할 정도라면 아마 소를 도축해서 먹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아마도 조선이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농사일에 가장 중요한 역용우를 지켜야 하는 일이 중요했겠죠.소고기를 맛보고자 하는 백성들의 욕망이 크다 보니 소를 너무 많이 도축해서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고민 했을 왕의 심사도 이해할 만합니다. 한편 우금령 때문에 몰래 소를 도축한 이들은 엄하게 처벌됐다고 합니다.우금령을 위반한 백성들은 태형에 처해 투옥되고, 조정의 관리라면 파직되거나 변방으로 내쫓겼다 합니다.조선시대에 소는 농사를 위해 정말 중요한 가축이었고 조선뿐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도 소 도축을 금하여 서양인에 비해 체구가 작았다는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 된 후 메이지 천황이 자신도 소고기를 먹을테니 백성들도 소고기를 먹으라고 장려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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