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기술자,장인들의 인식이 안 좋았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에는 도공 등 조선의 기술자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습니다.그러나 일본인들이 도공 및 조선의 기술자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았고 배불리 먹게 해 주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백성들을 끌어 안았어야 했는데 돌아온 조선인들에게 너 왜군과 밀통했지 라고 의심하고 한참을 고초를 겪어야 다시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당신이 당시의 조선인이라면 애국심만으로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돌아가면 환대는 커녕 왜군과 내통하지는 않았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하고 또다시 조선에서는 가혹한 세금과 자신들이 그리 넉넉하게 살지 못할텐데 일본에서는 장인이라고 대우해 주었으니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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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와 갈등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는 부자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인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쟁실패로 내 아들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아버지로써 마음이 썩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하지만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는 동안 그의 기록을 보고 받으면서 갈등의 씨앗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홍타이지가 인조와 소현세자를비교하면 자꾸 거슬리게 하면 소현세자를 왕으로 봉해 버리겠다라는 협박도 근근히 했구요. 거기에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생활을 마치고궁궐에 돌아왔는데 서학(천주교)를 배워서 서양문물을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청나라라면 이를 갈고 있던 인조 입장에서는 아버지를이렇게 모욕을 준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오다니 하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두사람의 갈등이 커졌고 그 갈등이 깊어진 것입니다.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 한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럴수도 있다고 추측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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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이지란은 여진족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조선인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초에는 건주여진족 부족장의 아들 출신이었습니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나라의 천호라는 직위를 수행하였는데 원나라가 약해지고 망할 기미를 보이자 고려에 1백기의 병사와 함께 귀순합니다. 당시 이성계가 있는 지역으로 귀순하였는데 그때 이성계를 만나 다툼이 생겼고 서로 활로 내기를 하다가 이성계에게 활솜씨에서패배를 인정하고 의형제를 맺게 되고 그 이후 이성계를 형님으로 모시면서 많은 전투에서 공적을 세웁니다. 이성계를 끝까지 따라 다녔고조선의 건국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성계에게 무한 신뢰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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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에게 제거 당한 김종서는 장군으로 쓰는 어떤 업적을 세웠나요 군사적으로?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종서 장군은 문관 출신이었지만당시 조선에서는 문관 출신이 군사를 이끌고 공을 세웠던 적이 많이 있습니다.김종서 장군의 별명은 백두산 호랑이로 세종의 명을 받아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들을몰아내고 그곳에 4군 6진을 설치하고 조선의 땅으로 병합하여 버립니다. 조선의 영토를 넓힌 공이큰 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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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여진족이라는 썰이 있더라고요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고려시대 쌍성총관부 소속 장군이었고 그곳에서 이성계도 아버지 밑에서 전장을 누볐고 쌍성총관부가 당시는 원나라 령이었지만 그 지역에 여진족들이 많이 살았고그지역의 여진부족들과도 어우러져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의형제 이지란 장군도 여진족 출신이고 그곳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것이지만 족보를 따라가 보면 전주지역의 고려의호족이었다고 합니다. 지방관리의 미움을 사서 도망치다 보니 여진족이 사는 지역까지 와서 정착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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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을 성군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성군이라고 할 수 는 없습니다.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물론 건국초기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는 명분은 있지만자신의 반대파를 너무 많이 숙청하였습니다. 정몽주, 정도전 일파를 다 죽였고 자신의 처가와 세종의 처가를 너무 말도 안되는누명을 씌워서 제거합니다. 물론 조선이 안정되고 세종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왕에게 대항하는 권신들이나 외척들을 제거해야 한다는명분이 있지만 굳이 죽였어야 했나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후계자 수업을 잘했고 왜구가 조선의 해안을 괴롭히자 이종무 장군을필두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은 강력한 왕권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속시원하고 잘한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공도 있지만 과가 컸던 왕이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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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왜 요동 정보를 하지 않고 위화도회군을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명나라가 생긴지 얼마되지 않아 북원과의 세력 다툼으로 요동의 군사력이 약했던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우리가 요동을 정벌하려 하면 명나라 주원장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명나라와 전면전이 벌어지면자원이 부족한 조선의 피해가 클 것이고 이성계도 전투의 승리에 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위화도에 들어섰는데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활이 못쓰게 되었고 그렇다고 요동정벌에 실패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실패에 대한 책임이 컸을 것입니다.만약 이성계가 자신의 가별초 등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회군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역행위니까요하지만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미 이성계의 편이었고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의 지도부도 이미 이성계 장군을 따르기로 다짐 한 상태였으므로 요동정벌로 죽임을 당하느니 개경으로 돌아와서 정권을 잡자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성계 장군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정치적 판단도 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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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원나라 침략기에 여러가지 풍습을 전해 주었는데 어떤 풍습을 원나라에 전해주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에 전해 주었다기 보다는 당시 원나라는 유목민족이었기에 문화적 수준이그렇게 높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대몽항쟁이후 원의 간섭으로 공녀 및 공물을 원나라에 보내게 되는데 이때 고려의 문화수준은몽고족 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의 옷이 몽고족의 옷 보다 세련되어 보여 의복문화가 전파 되었고 고려 만두, 떡 등 음식문화가 전파되어 원나라가 즐겨 먹었는데 이러한 부분을 고려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한류와 비슷하나 현재의 한류는문화의 전파 속도가 더빠르고 광범위하다고 생각하고 이때는 아픈역사의 어쩔수 없는 문화교류로 고려의 문화중 우수한 부분이원나라에서 어필을 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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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은 정말 혁명인가요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잘 못 읽은 오판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위해 들고 일어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성공했을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외세를 불러드린 것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세력이었습니다.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상대로 외세를 끌어들어 무참히 학살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살 수있도록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조선조정은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 놀아놔고 그가운데 백성들은 세금으로 모든 것을 다빼앗겨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해산한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은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조선왕조가 그 운명을 다했고 아래로 부터의 혁명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봅니다. 명성황후 및 민씨 세력은 그들의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해백성은 어찌되든 생각을 안했던 위인들로 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고종이 중심을 잡았어야 했는데 너무 휘둘렸습니다.고종이 동학농민군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주고 같이 힘을 합해서 외세에 대항했으면 어땠을까 지더라도 한번 크게 싸우고 지면억울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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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의 죽음에 관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역사를 조작한 것이 아닐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민왕이 홍륜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당시 고려조정의 권력은 이인임 등 권문세족에게 있었습니다. 이성계, 정도전 등의 급진개화파는 아직 고려조정에 세력을 이루지도 못하였습니다. 공민왕이 자신의 왕비의 죽음 후 마음이 너무 약해져서 실정을 한 듯 한데 그것에서비롯된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다면 당시의 권문세족인 이인임 세력이 주가 될텐데 공민왕사후 그들은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을 섬겼고 왕위에 올렸습니다. 조선의 건국세력이 조작했다기에는 시기가 조금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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