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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유사 이런 책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삼국사기는 기전체 중심으로 되어 있고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만 서술이 되어 있다는 점인 반면에 시대는 고려 중기에 해당하는 1145년에 저술되었구요.반면 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 중심이고 13세기에 저술된 책으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 뿐만 아니라 민간 설화 혹은 고조선 가야 발해의 역사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삼국사기는 정부관료가 쓴 책이므로 정사로 인정받고 있지만, 삼국유사는 스님이 쓴 책이어서 민간에서 전해오는 야사가 중심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실화라고 보시면 되는데, 이런 삼국사기도 철저하게 승자인 김부식 파의 주장이 중심이어서 객관적 시선으로 사료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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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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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돌잔치에 올려놓는 떡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돌떡은 돌날을 축하하기 위하여 만든 떡인데, 아이의 건강과 장수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친척이나 이웃 등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의례이기도 합니다.보통 돌잔치에 사용되는 떡은 오색송편, 백설기, 수수경단, 인절미 등입니다.- 오색송편 : 속이 꽉 찬 사람이 되라는 의미- 백설기 : 순수함을 의미, 장수를 기원- 수수경단 : 붉은색은 나쁜 기운을 막는다고 해서, 건강을 기원- 인절미 : 끈기 있고 굳건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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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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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조선과 사이가 안좋은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처음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부터 거란은 이웃나라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거란과는 가까이 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거란과는 멀리지내고 송나라와 친하게 지냈고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거란은 힘이 점점 강해져 요나라를 세우고 강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송나라는 문화수준은 높지만 군사력은 약해 후에 거란과 여진에게 밀려납니다.거란은 처음에 왕건에게 친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사신과 낙타 50여마리를 보냅니다. 하지만 왕건은 사신을 가두고 낙타를 만부교에 묶어놓아 모두 굶어 죽였습니다. 이게 바로 만부교 사건입니다. 그 뒤에 거란은 힘을 키워 고려를 침략합니다.1차침략 => 거란의 소손녕이 쳐들어왔으나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고려는 강동 6주를 얻음2차침략 => 고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침략, 개경까지 함락될 뻔하다 겨우 물리침3차침략 => 거란이 다시 힘을 길러 침략, 강감찬장군이 귀주에서 적군을 크게 물리침 (귀주대첩)거란과의 전쟁뒤 고려와 거란은 친해게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 거란은 전쟁으로 힘이 약해져 그동안 힘을 길러온 여진에게 밀려 망하고 여진은 금나라를 세웁니다. 그래서 결국 고려는 다시 금나라와 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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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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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전염병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전염병이라면 흑사병(페스트)를 빼놓을 수 없죠. 자그마치 2천 5백만(14세기 당시 유럽인구의 1/3)을 죽여버렸으니까요. 비슷한 시기 중국 역시 13세기와 14세기 두 번에 걸친 흑사병의 공격을 받았는데, 각각 인구의 50%(1억 2천만 중 약 6천만)와 30%를 줄여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이 때 흑사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중동, 유럽, 중국 등지에서 발생한 것을 봤을 때 당시 실크로드와 몽골군의 침입경로 등과 확실한 관련이 있는것만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흑사병은 14세기뿐만이 아니라 이후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창궐하면서 계속적으로 피해를 주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흑사병이 일어났던 지역마다 30~50%가, 많게는 인구의 80% 이상이 사망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인플루엔자의 경우 또한 1차대전 당시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으로 5억여 명을 감염시키고, 최소 4천만명 이상을 사망시켰다고 하더군요. 흑사병과 인플루엔자에 비하면 전쟁에 의한 사망자는 적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연합국-추축국을 통틀어군인 약 2천 2백만, 민간인 약 4천만 통틀어 약 6천 2백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1차대전의 경우도 군인만 약 9백만정도가 사망했고, 실종자 역시 7백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가장 잔혹한 전쟁이었다고 불리는 독일 30년전쟁의 경우 기록은 없지만, 독일에서 자행된 수많은 약탈과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상당한 인구감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염병의 주된 이동경로가 사람의 이동과 관련이 있고, 사람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는 경우는 보통 전쟁밖에 없으며, 흑사병은 몽골의 세계정복과정에서, 스페인독감은 1차대전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과 2차대전 때에는 전염병을 막을만한 의학적 발전이 있었다는걸 생각해 볼 때, 전염병의 원인이 전쟁에 있었다면 결국 세계인구를 가장 잘 줄인 것은 전쟁일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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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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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분의 49제는 왜 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49재(齋)"란 사찰[절]에서 스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의식으로,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불경을 외면서 7번에 걸쳐 (7 X 7 = 49) 재(齋)를 올려, 죽은 이가 그 동안에 불법을 깨닫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곳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사찰의식인데, 이 49재를 지내는 중에 죽은 이가 생전의 업(業)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의 생(生)이 결정된다고 믿고 행하는 의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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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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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군사력의 주축인 화랑제도는 누가 만들었나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화랑도가 국가적 집단으로 조직 편성 된것은 신라 진흥왕37년인 576년의 일입니다. 화랑제도는 특정인이 만든 것은 아닌것으로 보입니다.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원래 화랑제도의 기원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가 거느리던 여자들로 조직된 '원화'라는 조직이었으나, 지소태후의 총애로 원화가 된 법흥왕의 딸 남모가 전대 원화였던 준정의 질투를 사게되어 준정의 계략으로 살해되자 576년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제도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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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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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가 왜 가치있는 그림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모나리자의 가치에... 대해 그러지 않아도 전부터 분분했던문제라는데요.최근에 댄브라운<다빈치 코드의 작가>의 책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다. 모나리자가 그토록 세인이 관심을 끌고있는 이유는뭔가 아는 사람들 말처럼 신비로운 미소 따위가 아니고다빈치 자신이 그 그림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기 대문이랍니다. 그 이유는 다빈치 말에 따르면<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장 품위있게 묘사했다.>라네요. 하지만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뭐..솔직히 별로죠..그런데 다빈치는 그림 속에 암시와 상징을 많이 남겨놓았다는데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겁니다. Amon이란 말은 고대 이집트 정력을 나타내는 남신의 이름.반대의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 이시스의 상형문자를 알파벳으로 표기하면 Lisa가 된다는데 이를 합하면 ..< Amon Lisa > 가 되고 이를 애너그램(철자 바꾸기)하면 MonaLisa(모나리자)가 됩니다. 즉 양성을 나타낸다는 겁니다.이 그림은 다빈치 자신이 여장을 하고 자화상을 그렸다는 말도 있고 현재에 와서 컴퓨터 분석을 통하면 상당히 비슷하단 말도 있습니다. 동성애자인 다빈치가 남녀합일의 사상의 신성함을 나타낸다는 얘긴데 ..얘기가 이 쯤 되면 저도 헤갈리더군요.암튼 ..이 그림은 다빈치가 스스로 가장 아낀 그림이라 그렇게 유명세를 타고 수수께끼로 여겨진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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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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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뒷풀이 발바닥 때리던 풍습의 의미는 뭘까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새신랑 발바닥 때리기는 오래전에 있던 풍습 '동상례'이 전해져내려온 것입니다. 동상례는 혼례가 끝난 뒤 신부집에서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절차로, 신랑의 또래 친구들이 모여 앉아 '신랑 다루기'를 하게 되는데요, 친구들은 신랑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짓궂은 질문을 던지고 신랑의 답변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발바닥을 방망이로 때리곤 했습니다 겉에서 보면 단순한 괴롭힘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새신랑 발바닥 때리기'에는 신랑을 위한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발바닥을 때리는 짓궂은 장난에는 "결혼이 어렵다는 걸 알아야 쉽게 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있으며 신랑의 '성(性) 기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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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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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절 전시과 제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고려 토지제도는 다음의 순서로 변합니다.역분전 > 시정전시과 > 개정전시과 > 경정전시과> 전시과의 붕괴/녹과전 지급 > 농장 > 과전법역분전은 고려 태조가 통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지급한 것으로 그 기준을 인성, 행동의 선악, 공로의 크기로 했습니다.(공신들에게 주는 포상의 개념)광종 시기에 관리의 등급을 정하면서 토지제도도 이에 맞춰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종 때 처음 전시과가 시행됩니다.(처음이라서 시정전시과) 시정전시과는 관리의 등급이 높고 낮음에 따라 받을 토지의 크기를 구분하였고, 여전히 인품이 지급의 기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목종 시기에 전시과 제도가 수정되는데 이를 가리켜 개정전시과라고 합니다.개정전시과에선 드디어 인품 기준이 사라지고 오로지 관리의 직책과 등급으로 구분했습니다. 또한 군인들에게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마지막 개정은 문종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다시 고쳤다고 하여 경정전시과라고 합니다. 그 특징은 현직에 있는 관료만 지급했다는 겁니다.이는 나눠줄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한편 전시과에는 독특한 토지가 있었는데 바로 공음전입니다. 공음전은 5품(품은 등급) 이상의 높은 관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대대로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 공음전 외에도 지방 향리들을 위한 외역전, 직업군인에게 준 군인전, 예비 관료를 위해 지급한 한인전 등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전시과 제도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반납해야 하는 땅을 불법으로 물려주거나 타인의 수조지를 침범하는 등 문제가 생겼습니다.결국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마구잡이로 땅을 빼앗아 전시과제도가 무너집니다. 특히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은 뒤로는 권력자들이 문서를 위조하여 토지를 확장해 대규모의 땅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농장입니다. 농장이 많아질 수록 국가의 세금이 줄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는 무분별한 귀족과 사찰의 농장을 없애기 위해 경기 지역에서만 수조지를 나눠주도록 규정한 과전법을 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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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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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간도를 찾아 올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간도협약만 놓고 보자면 우리 영토인 간도를 빼앗긴 것 처럼 보이지만 이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간도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백두산 정계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과연 간도가 우리 땅이 맞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지요.조선은 건국 초부터 모든 군현에 관리를 파견했습니다. 울릉도와 제주도처럼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지역까지 목사와 군수를 파견했지요. 하지만, 간도지역에 관리를 파견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883년 서북경략사, 1885년 토문감계사이며 1903년 간도관리사로 이범윤을 파견한 것이 전부입니다.즉, 그 이전까지는 조선의 영토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를 포함해 조선시대 당시 그려진 여러 지도를 보면간도지역은 우리 영토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통일이 되어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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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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