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밀어낸 이유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녕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장자승계의 원칙에 의해 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 신경 쓰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태종의 골치를 썩였지만, 태종은 세자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었던 터라 얼마 동안은 타이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자,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에 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자주 살피라는 우빈객 이래의 말에도, 다 큰 부자지간에 그렇게 간섭하면 반드시 서로의 사이가 나빠진다며 듣지 않았을 정도. 태조가 왕위 서열을 무시하고, 형제 중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의 피를 보고 권좌에 오른 이였던 만큼, 태종으로서는 장자인 양녕에게 피를 보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그러나 양녕은 이오방, 구종수와 궐을 나가 논 것을 비롯하여,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온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 해, 태종과 원경왕후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실록에 보면,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며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탄을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7]태종이 양녕이 저지른 사고들을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은 파직시키자 양녕이 곡기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원경왕후가,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父王)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8]며 꾸지람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상술(上述)했다시피, 양녕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장인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장인의 집에 숨겨두고[9]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은 "아바마마도 첩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 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태종은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수서를 보여주며, "얘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했다. 그 외에도 양녕은 기생들과 놀고, 매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10]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세자양보설'과 반대로, 충녕대군이 인격과 학문 양쪽 모두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자, 세자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우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듯하다. 여러 대군들과 함께 부마 이백강의 연회에 가서 기생과 놀다가,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사 여기까지만 봐도, 양녕대군의 행적만 보면 그간 태종이 화병이 안 생긴 것이 신기한 걸 넘어 이상할 따름이다. 양녕대군이 이 분의 아들이었다면, 폐세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됐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Q. 소프라노,테너,바리톤 처럼 성악을 구분짓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악가가 소리낼수 있는 음역대로 구분짓습니다.소프라노는 여성중 가장 높은음역대를 연주하는 파트구요, 음색이나 테크닉에 따라 콜로라투라,리릭,드라마틱 등으로 세분화됩니다.남성은 테너가 가장 높은 소리, 중간음역대 바리톤, 저음을 노래하는 베이스로 나눕니다.각 파트마다 가장 아름다운 음역대를 아름답게 노래할수있을때 구분짓기도 합니다.
Q. 메탈음악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0년대 후반 영국과 미국의 하드 록 및 블루스 록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빠른 템포와 강한 비트, 악기 솔로, 둔중하면서도 시끌벅적한 사운드 등이 특징인 록 음악의 장르를 의미한다. 보통 헤비 메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고, 이렇게 부르면 대체로 이 장르를 가리키지만, 레드 제플린과 같은 1970년대 초반의 고전적인 메탈 음악가들만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Q. 하이든이 모짜르트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각각 어떤 정도의 평가를 받았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하이든은 계몽주의의 진정한 대표자였습니다. 삶에 대한 그의 낙관적 인 접근; 지성과 감정 사이의 균형을 위한 그의 노력; 그의 절제 감각은 강하게 불협화음의 기분을 피하게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음악에서 뛰어난 표현을 발견했으며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음악 애호가들은 또한 유머의 유쾌한 발발로 촉발 된 그의 관용구의 고귀함과 기만적인 단순성을 저항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 음악의 유쾌함과 자연 스러움은 어둡고 복잡한 분위기와 양가 적 감정이 음악에서 탐구되고있는 19 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덜 호소력이있었습니다. 그의 많은 교향곡과 사중주가 1850년을 훨씬 지나서 어느 정도 빈도로 연주되었지만 세기 말까지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하이든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있었고, 그의 뛰어난 주제적 정교함, 신뢰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재치, 변조의 독창성,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의 예술성과 뛰어난 장인 정신이 다시 한 번 높이 평가되었습니다.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겨 전시대를 통틀어 음악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1762년 첫번째 음악 여행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1769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보았고 첫번째 이탈리안 오페라를 썼다. 1780년대 후반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코지 판 투테〉등의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35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Q. 유럽 네오나치란것은 히틀러를 추종하는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네오 나치(Neo-Nazi)는 자신들을 '나치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민족사회주의를 숭배하는 사람들로, 보통 극도의 국수주의, 제노포비아와 인종차별, 반유대주의[4], 백인우월주의와 결합하는 때가 많으며, 드물게 몽골처럼 유색인국가에서 네오 나치를 표방할 경우 극단적인 국수주의랑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대표격 국가인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뿐만 아니라 같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 일본 및 이들과 연루된 인도, 이란을 비롯해 추축국과 적대적인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몽골 등등을 포함해 전세계에 걸쳐 골고루 분포한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에서도[5] 그 존재가 확인된 바 있다.사실, 실제 나치들과 마찬가지로 본인들도 "나치"라고 불리는 건 싫어하고 정식명칭인 국가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우연히도 바이에른의 뮌헨 지방에서 농부 이름으로 흔한 이름 이그나츠(Ignatz)의 약칭이기도 해서 수구꼴통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