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동물이 가장 먼저 가축화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야생동물이 인간에 의해서 순화되어 가축화된 것은 선사시대부터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가축들이 가축화된 것으로 되어 있다.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가축은 개로서 약 1만 2천년 전에 이미 사육되었고, 소·말·돼지·면양·염소 등은 1만여 년 전에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우리나라의 재래종 소인 한우는 유럽원우와 인도원우의 혼혈에서 출발하여 1800∼20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다른 소의 품종과 교잡 없이 단일종으로 번식하여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말은 고대의 부여·고구려 때부터 사육되어왔고, 돼지는 2000여 년 전 북방으로부터 유입되어 우리 민족의 원시조상인 읍루족에 의해서 사육되기 시작하였다.면양은 기원전 150여 년경에 부여에서 사육하였으며, 산양은 우리나라에서는 염소라고도 하는데, 1000년경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처음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부여에서는 군사(軍事)가 있을 경우 소를 잡아서 그 발톱의 상태로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소의 발톱이 벌어진 경우는 흉조로 합쳐진 경우는 길조로 삼았다고 하며, 고구려에서는 제천행사 때 돼지를 잡아 제를 지냈다고 한다.또 변한에서는 소와 말을 혼례식에 이용하였으며 마한에서는 순장에 이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가축들은 사육 초기에는 주로 희생·순장·점술에 이용되었으며, 식용은 부차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족은 짐승을 기르는 데 능숙하고, 관직명으로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가축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내용이나, 『위서』 고구려조에 유화가 알을 하나 낳았는데 부여왕이 이 알을 개에게 주었더니 먹지 않았고 돼지나 말·소에게 주어도 피하였다는 주몽의 탄생설화, 백마·백계(白鷄)와 관계있는 박혁거세·김알지의 탄생설화, 읍루족에게는 소·말이 있고 돼지를 즐겨 기른다는 기록, 제주도에서도 소와 돼지를 기르고 마한에서는 세미계(細尾鷄)가 난다는 기록 등은 우리나라 고대의 가축사육을 추측할 수 있는 사료들이다.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목축을 권장하여 내륙·섬 등에 소나 말을 사육하기 위한 국립목장이 운영되었고, 공사(公私)의 제(祭)에 암컷을 쓰는 것을 금하였으며, 마정을 다스리는 사복시(司僕寺), 잡축(雜畜)을 기르는 전구서(典廐署), 제사용 희생을 맡는 장생서(掌牲署) 등의 직제가 있었다.『고려사』 병지(兵志)에 의하면 가축의 사육료식(飼育料式)도 있었는데, 이것은 일 년을 두 시기로 나누어 5월부터 9월까지를 청초절(靑草節),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를 황초절이라고 하며 가축 한 마리에 대한 매일의 피·콩·소금 등의 공급량을 규정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가축은 주로 전쟁과 운반·농경에 쓰였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가축은 주로 역용으로 사육되었으며, 유교의 사농공상 계급관념은 실학이나 실업을 천시하여 가축의 사육과 이용이 장려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까지도 가축사육은 농사를 짓기 위한 노동력의 확보, 군마의 육성, 그 부산물로 얻어지는 두엄 등을 이용하는 데 불과하다가 민족항일기에 이르러, 식민정책의 영향으로 외국가축의 도입, 관영목장의 경영, 일본인들에 의한 유우·면양·종마 등이 산업적으로 사육되기 시작하였다.1945년 광복을 전후한 사회혼란기에는 일본인 소유였던 젖소·종축을 비롯한 많은 가축이 도살되어 그 당시의 가축 수는 광복 전에 비하여 반으로 줄어들었다. 미군의 군정실시 후 어느 정도 사회질서가 회복되면서 가축장려정책이 수립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가축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전쟁이 끝나고 1953년에 제1차 축산부흥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1957년에는 남한에서 사육된 가축의 수가 광복 전의 남북한 전체 가축 수보다 많게 되었다. 1958년 제2차 축산부흥5개년계획으로 부업형태의 가축사육이 유축농업적(有畜農業的)인 형태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뒤 주로 미국으로부터 각종의 가축품종들이 도입되었는데, 특히 가금류와 중소가축의 도입이 활발하였다.1960년대에는 경제력과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축산물의 수요가 점차 늘어남으로써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 축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는 낙농·양계 부문에서 상업적인 축산이 시작되게 되었다.그 뒤에도 한우육성과 비육, 낙농사업 등의 축산진흥정책이 계속적으로 수립되어 농가경제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기업적·전업적인 수준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Q. 기원전 기원후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을 뜻하는 BC와 기원후를 뜻하는 AD는 그 의미가 무엇이든 지금은 너무나 널리 쓰이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일본이 아직도 메이지(明治)니 헤이세이(平成)이니 하는 연호를 사용하여 연대 표시를 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연대표시라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나라에서 같은 것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1950년대까지는 단기(檀紀, 단군 기원)를 사용했다.특히 BC와 AD가 어떤 의미를 갖고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알고 나면 여러분의 생각에 꽤 큰 충격이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말부터 살펴보자. 기원(紀元)이란 햇수를 세는 기준이 되는 해를 뜻한다. 그러니까 기원전(紀元前)이란 햇수를 세는 기준이 되는 이전이란 의미다. 사실 나로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오래전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선사시대(先史時代)가 역사의 기록을 남기기 이전 시대란 것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 기원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대단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고, 인류의 기원, 문명의 기원, 다양한 종교의 기원, 철학의 기원이 될 만한 자취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갑자기 햇수를 세는 기준이 왜 그때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도 기원전 시기가 햇수를 세는 기준도 못 되는 낙후된 시대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기전(西紀前), 그러니까 서양에서 사용하는 기원 이전이라는 명칭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그렇다면 기원전이란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기원전, 즉 BC는 기원후, 즉 AD와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BC는 알다시피 ‘before Christ’, 즉 ‘그리스도 이전’이란 의미다. 그러니까 결국 기원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뜻한다. 그리스도 탄생 이전은 햇수로서의 의미도 없다는 기독교적 사고의 산물인데, 이것도 사실은 17세기에 들어서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A.U.C.(ab urbe condita), 즉 ‘도시의 건립으로부터’라는 뜻을 갖는 용어를 사용했다. A.U.C.는 기원전 753년이 원년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도시란 곧 로마를 의미한다. 한편 A.M.(anno mundi)도 사용했는데, 이는 ‘세상의 해’라는 의미로 기원전 3761년에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유대교 책력에 따른 것이다.
Q. 비발디의 사계가 인기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비발디비발디의 작품의 양은 대단히 많으며, 약 40곡의 가극을 비롯하여 성악곡, 실내악곡, 협주곡 등이있으며, 특히 협주곡은 오늘날의 협주곡에 한 걸음 다가선 것으로서, 음악사상에서도 높이 평가되고있으며, 연주되는 기회도 많다.음악의 특징은 "사계"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가 명확하다는 것, 화성이 뚜렷하다는 것, 교향곡이나소나타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구성 등이다. 비발디의 곡이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은 이런이유 때문일 것이다. 비발디가 다른 작곡가에게 준 영향도 커서, 바흐가 그의 작품을 연구한 사실이 유명하다. 바흐작곡의 오르간 협주곡에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바탕으로 한 곡이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또 코렐리, 토렐리의 뒤를 이어, 합주 협주곡·독주 협주곡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그의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발디 사계"여름"협주곡 제2번 사단조 "여름" in G minor제 1 악장 : Allegro non molto-AllegroAllegro의 빠른 악장. 전반부에 가축과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또 푸른 들판의 나무와 풀들까지도 붉게 물들이는 폭염을 권태롭게 묘사하는 짧은 모티브로 시작하는데, 이어, 솔로 바이얼린이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현악약주가 산들바람을 묘사한 후 32분음표로 연결되는 격렬한 폭풍으로 곡을 끝맺는다.내리쬐는 햇볕이 뜨거운 계절, 사람도 가축도 축 늘어졌다. 빠국새가 울고, 멧비둘기와 방울새가 노래한다. 산들바람이 솔솔 분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폭풍이 몰아친다. 양치기는 소나기가 두려워서 신세를 한탄한다.리토르넬로는 무더운 여름분위기를 나타낸다. 뻐꾸기와 산비둘기 같은 여러 새들이 노래한다. 힘없는 바람이 땅 위로 불 때에 "거기에 대항하여 북풍이 불시에 불어와 덮친다." 빠른 32분음표의 소리가 폭풍이 되어 달려든다.날카로운 화음들은 사람들의 공포를 묘사한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모든 것은 곧 지나간다.제 2 악장 : Adagio-presto-Adagio2악장은 22마디에 불과한 짧은 간주곡(패지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폭풍전야의불안한 생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악장입니다.사람을 공포와 불안으로 몰고가는 번개와 천둥을 트레몰로 강주로 표현하고 있고,이후에 솔로바이얼린은 귀찮고 성가신 파리와 모기떼의 극성을 익살스럽게 표현해내고 있다.번개와 천둥에대한 두려움, 극성을 부리는 파리와 모기떼에 시달려 양치기는 쉬지도 못한다.제 3 악장 : Presto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을 묘사한 것이다. 무시무시한 번갯불과 천둥소리가 들리고폭우가 쏟아진다. 이로써,애써 가꾼 농작물에 엄청난 해를 주고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비스듬히 퍼붓는 하행 패시지나, 트레몰로를 강주하는 현악합주로 묘사되고 있다.양치기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우르릉 쾅쾅,이윽고 우박이 퍼붓듯이 쏟아져서 다 자란 보리 이삭들을 때린다."하늘은 으르렁대고 우박은 옥수수와 꼿꼿이 서 있는 콩들을 부러뜨린다." 트레몰로, 쏟아지는 음계,분산화음, 안절부절못하는 베이스음형, 분주한 현 바꿈을 위한 손놀림, 높은 음역의소리들이 특징적이다. 독주 음악도 이러한 분주한 소리와 함께 같이 간다.
Q.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놈은 어떻게 구별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조선 시대의 신분 구분 조선 시대의 신분은 양반, 중인, 상민, 그리고 천민으로 나누어 졌습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제각기 할 수 있는 일과 권리 그리고 의무가 달랐습니다. 2. 각 신분이 한 일 양반 : 양반은 조선 시대 때에 가장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양반이 신분인 사람은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중인 : 중인은 양반 다음의 계급입니다. 그래서 중인은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였습니다. 상민 :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였습니다.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에 가장 많았습니다. 천민 : 천민은 조선 시대 때 가장 낮은 하급 계급이었습니다. 천민에는 '종'이라고 불린 노비들과 천하게 여겼던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Q. 외국나라는 음력 달력을 보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어 사용국들은 일단 우리와 똑같은 음력을 씁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쓰는 음력은 태양태음력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달과 태양을 모두 계산하기 때문에 복잡하거든요.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기간은 두 가지로 나눠 이야기합니다. 지구의 태양에 대한 공전을 무시한 항성월과 공전을 고려한 삭망월이죠. 달의 모양이 변하는 주기는 삭망월에 따릅니다. 달이 뜨는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항성월입니다.지구의 공전 주기는 365.2422일이고 달의 지구에 대한 공전 주기는 29.53일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달과 해가 정해지는 것이지요. 양력은 달보다 해를 우선하는 것입니다. 1년은 일로 기준하면 365.2422일이고, 월로 기준하면 약 12.38월이 되지요. 그래서 양력은 365.2422일을 정확히 12개월로 나눈 것입니다. 4년에 하루씩 윤년이 있고요. 그런데 12.38월을 12월로 맞추려다 보니 원래 한 달 길이인 29.53일을 넘어서 30일 또는 31일이 되게 맞춘 것입니다. (2월은 예외) 그래서 날짜와 달 모양이 전혀 관련이 없게 된 거죠. 한편 한국과 중국의 태양태음력은 해보다 달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한 달 길이가 29.53일이니까 한 달은 29일 또는 30일이 됩니다. 그리고 1년이 12.38월로 되어 있으니 어떤 해는 12개월, 어떤 해는 13개월로 해서 맞추는 것입니다. 19년에 7번을 넣는 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태양-달-지구가 정확히 일직선이 되는 날을 음력 1일로 정합니다. 그러다 보면 29일인 달이 있고 30일인 달이 있는 것이죠. 정확히 일직선이 되는 때는 일반인이 알 수 없으니 며칠 뒤의 음력 날짜를 예측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1년이 13개월일 때는 윤달이 들어갑니다. 윤달을 넣는 법도 좀 복잡한데, 태양과 지구와 달의 운동을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넣는 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달과 계절이 어느 정도 맞지만 양력처럼 잘 맞진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24절기입니다. 24절기의 각 절기는 지구가 태양을 기준으로 해서 특정한 위치에 있는 때로 정한 거죠. 그러므로 양력 날짜가 거의 일치하는 것입니다.이슬람 음력은 태양태음력과 달리 윤달이 없습니다. 무조건 12개월이면 1년이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월과 계절이 전혀 안 맞게 됩니다. 대신 날짜 예측은 쉽습니다. 홀수달은 30일까지, 짝수달은 29일까지 있고 12월은 달의 운동에 따라서 약 3년에 한 번씩 30일까지 있고 그 외에는 29일까지 있습니다. 현대 달력은 순수 양력이고, 이슬람 달력은 순수 음력이라 계산이 편하지만 동아시아 음력은 태음태양력이기 때문에 더 복잡합니다. 대신에 자연 현상을 더 많이 반영한 것이지요.
Q. 옛날에 내시의 선발 기준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고려시대는 '제3의 성'이라 불리는 환관이 아닌, 문관들로 구성된 내시가 따로 있었다. 이들은 가문과 학식,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선발된 국왕 측근 엘리트집단이었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의 창시자인 최충(崔忠)의 손자인 최사추(崔思諏),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 주자학을 도입하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安珦) 등은 모두 학문적, 관료적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직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고려내시들은 여러 근시(近侍)들과 함께 왕의 행차에 동행하였을 뿐 아니라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경전의 강의, 왕실재정 관리를 하였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내시가 언제, 어떠한 조직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가장 앞선 기록은 918년(태조 1)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職預)를 내시서기(內侍書記)로 삼았다는 『고려사』 세가 기록이다. 내시의 선발기준이 보다 분명해진 때는 11세기 문종 때이다.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용모가 수려한 문인 20명을 내시로 뽑아 시종케 하였으며, 근무대가로 별사미(別賜米)를 주었다.그 후 12세기 의종 대에 이르면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儒臣)들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조직을 갖게된다. 그런데 국왕의 근시직이었던 만큼 내시가 되는 중요한 요건은 국왕의 총애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과거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무신집권기에는 비로소 무신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한편, 고대 갑골문자에도 보이는 환관의 존재가 우리나라 기록에서는 826년(신라 흥덕왕1)에 처음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환관이 있었으나 규모는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역할은 '왕명전달'이 아니고, 주로 궁궐 청소와 궁녀들의 관리를 맡았다. 왕의 총애를 받아 승진한다 하여도 7품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다. 물론 의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환관 정함이 내시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환관이 내시가 될 수는 없었다.하지만 14세기 원간섭기, 출세한 환관들이 많아지고 궁궐 내 환관에 대한 역할이 늘어나자 내상시, 내시감, 내승직, 내급사 등 정2품부터 종9품에 이르는 환관들만의 부서를 갖게 되었다. 바로 1356년(공민왕 5)에 121명의 정원을 가진 내시부(內侍府)가 창설된 것이다.이처럼 고려 말 환관들만의 내시부가 만들어진 것과 반대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내시는 군 복무 대신에 들어가 궁궐을 숙위하는 성중관(成衆官)으로 위축되었다. 선발조건은 여전히 가문과 재능과 용모를 따졌지만 조선 초 1466년(세조 12) 폐지될 때까지 궁중 숙위의 기능만 가졌을 뿐이었다. (출처: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58534)조선의 내시부내시부는 환관(宦官)의 부(府)로서 왕 및 왕비전(王妃殿) 그리고 세자와 세자빈궁(世子嬪宮) 등에서 식사의 감독 · 명령의 전달 · 수문(守門) 및 청소 등을 맡았다. 정원은 140명으로 상선(尙膳, 종2품) 2명, 상온(尙춠, 정3품) 1명, 상다(尙茶) 1명, 상원(尙苑, 종9품) 등 59명만이 관직을 갖고 있었고 그 나머지는 관직이 없었다.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unwhasa/txt/text/4-3-1-2-1-1-3.html상선(尙膳) 2인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 내시부의 으뜸 벼슬이며, 임금·비빈(妃嬪)·대비(大妃)·왕세자의 식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내시부의 관원을 감독.상온(尙춠) 1인 궐내 술빚는 일을 관장 상다(尙茶) 1인 궐내 왕과 비빈등 왕족에게 차를 대접하는 일을 관장상약(尙藥) 2인 궐내 탕약을 관장상전(尙傳) 1인 왕명의 전달상책(尙冊) 3인, 궁중에서 쓰이는 서적을 관리하는 일상호(尙弧) 4인 궐내 무기창고 관장상탕(尙帑) 4인, 궁궐 재화관리상세(尙洗) 4인, 궁궐안의 왕족의 세숫물 목욕물 관장상촉(尙燭) 4인, 궁내 등불의 관리, 소화, 상훤(尙煊) 4인, 궁내 아궁이등 각 방의 난방을 관장상설(尙設) 6인, 휘장·인석(茵席)·장설(張設) 등에 관한 일 상제(尙除) 6인, 상문(尙門) 5인 궁궐 문을 지킴상경(尙更) 6인 왕의 곁에서 잡다한 시중을 든다. 야간에 시각을 알려주는 일을 함.상원(尙苑) 5인 궁중의 정원을 가꿈등입니다. 그밖에 이속으로 서원 2인과 사령 1인이 있었고요.궐내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 청소 등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궐내의 모든 잡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내시부 관원으로서 4품 이하는 문·무관의 근무일수에 의거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으나, 3품 이상은 왕의 특지가 있어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근만(勤慢)에 대한 규찰은 승정원에서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내시부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지만, 내시의 폐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그 세력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성종 1년(1469) 내시부직은 4품을 넘지 않도록 제한한 것은 좋은 예이다. 이후로도 조선 전시기를 통하여 내시에 대한 규제론은 끊이지 않았으며 실제 내시의 세력은 미약하였다. (출처: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141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