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판문점 도끼 사건이 왜 일어난 건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판문점 유엔(UN)군 측 제3초소 남방 30m 지점에, 앞을 가리는 미루나무가 있어중대장 보니파스 대위가 한국 노무자 다섯 명을 포함해 14명의 인원을 데리고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그 때 난데없이 북한 경비병 30여 명이 몰려왔다.그들은 시비를 걸다가 유엔(UN)군에 도끼를 빼앗아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소위를 죽이고, 8명의 중상을 입혔다.그 날 오후 5시, 북한은 전체 인민군(북한)군과 노동적위대, 붉은 청년 근위대 등모든 정규군과 예비군에 전투 태세 명령을 내렸다.그리고 다음 날엔 조선 통신사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그들은 미군 장교를 죽인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말도 하지 않았다. 주한 미군도 북한을 응징할 준비태세를 갖추었다.유엔(UN)군은 한국과 의논한 끝에 미루나무를 베어 버리기로 하였다.한국군이 미루나무를 벨 때 북한이 덤빈다면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그 날 박정희 대통령은 3군 사관 학교 졸업식에서. . .의외로 강하게 나오는 한.미 양국의 행동에북한은 당황했다.결국 길일성이 유감을 표시한 사관문을 판문점을 통해전달함으로써 사건은 마무리가되었다.인민 무력 부장 최현은 작전 국장을 불러 화풀이를 했다.사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졌을 때, 북한은 국가 동원령을 내려 평양과 황해도,강언도 등의 주민들을 소개시켰다.그 결과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너무 힘든 나머지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Q. 폴란드는 왜 주변국의 침략을 받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맥락을 보시면 비슷하다고 느끼실겁니다국제연맹의 무능함과,나치당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며 1933년 국제연맹 탈퇴, 베르사유조약 위반, 군대 재무장 선언하고 전쟁 준비.프랑스와 영국, 폴란드는 상호 방위조약으로 결속되어 있어 폴란드를 침공하면 당연히 전쟁을 불러오게 되므로 1차 대전의 힘든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양면 전선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기에.독일은 폴란드의 우측에 위치한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독ᆞ소불가침조약을 맺어 폴란드를 침공하면 영토를 동서로 나누어 차지하자며 스탈린을 만나서 딜을 하였고,과거 독일의 영토를 다시 되찾기 위해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Q. 후고구려의 궁예는 어떻게 군주가 되었나요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은 김.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회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 죽주의 산적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898년양길을 타도하고 송악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에서 성책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라 개칭하였다.궁예는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을 비롯하여 병부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과 제휴하여 진도·나주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 두 아들은 보살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Q. 온달 장군은 실존 인물 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온달 장군은 삼국 시대 590년(고구려 영양왕 1)에 전사한 고구려 장군으로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남긴 실존 인물이다.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아차산에는 온달에 얽힌 유적과 함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온달 장군이 신라와의 전투 중에 눈을 감은 곳이라고 전해지는 아차산성이 남아 있고, 아차산 중턱에는 온달 장군이 마셨다고 하는 온달샘이 있으며, 전사한 온달 장군의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평강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아아, 이제 돌아갑시다." 하니 상여가 움직였다는 슬픈 애사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