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 투사는 누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인영(李麟榮, 1868년 9월 23일~1909년 9월 20일)구한말의 의병장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여 유학을 익히다가, 1895년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여주를 기반으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무력으로는 관군과 일본군을 당하기 힘들었고,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이인영은 의병대를 해체하고 문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윤동주시인 1919년후학양성하여 독립의지 고취 항일운동 홍범도 장군봉오동 전투(도문, 연길, 용정, 화룡)(1920년)1920년대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의 포문을 연 봉오동전투는 청산리대첩과 함께 독립군의 위대한 전투로 꼽힌다. 이는 1920년 6월 4일 삼둔자전투에서 시작됐다. 삼둔자란 두만강 중류 북쪽 대안의 한 마을 이름이곳에서 그의 부대는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사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 세력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이후 10월의 청산리대첩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다.김좌진 장군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전개 (1925년) 흑룡강성 남부 지역은 주 활동무대였다. 그는 청산리대첩 이후 1925년 북만주 독립군단을 정비해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를 결성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간부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일승첩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청산리대첩.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26일까지 엿새 간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어랑촌, 완루구, 고동하 등지에서 1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였다. 이범석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1945년 귀국을 시도했다가 강제로 상해로 되돌려보내졌고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호상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지청천(池靑天)1888년 2월 15일 종로 ~ 1957년 1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며,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이회영, 이철용, 이상룡, 이동녕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조선족중심소학교 동명학교(1919-1925년)이 학교를중심으로 독립운동 기지화 투사 양성 신흥무관학교 입교로 군관 양성지원
Q. 우리나라에서 동물을 주제로 그림그리는 화가님이 계시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암- 모견도 ,김두량 - 삽살개 , 김홍도 - 호랑이,이중섭- 소, 김기창- 부엉이, 변상벽- 고양이 등이 있습니다
Q. 천주교와 기독교는 어떻게 해서 분리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대교가 먼저 생겨났고그리스도교(기독교; 가톨릭,정교회)가 생겨났으며,이어서 이슬람교가 생겨났고,이어서 개신교(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침례교, 순복음교 등등)가 생겨났습니다.
Q. 캄보디아 집단 학살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75년 크메르 루지에 의해 친미 정권 논놀 정부가 무너지고 캄보디아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기를 맞이합니다.우리가 잘 아는 킬링필드의 2막이 오른 거지요.제 1 막은 베트남 전쟁을 위해 미국이 "호치민 루트(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과 캄보디아의 국가원수 시하눅 왕자가 맺은 밀약에 의해 북베트남군, 소위 베트콩이 캄보디아로 우회하여 남베트남을 공격하는 이동로)를 폭격한다는 미명하에, 국제적 협약과 미국 내의 법도 무시한채 비밀폭격을 가하고(이 폭격으로 민가 약 200만채가 파괴되고, 최소한 80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합니다.), 미국 하수인 논놀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자국민 약 50만명을 처형하는 폭거가 바로 제 1차 킬링필드입니다.이런 말도 안되는 정부는 민심을 잃은지 오래였고, 밀림 속에 숨어 있던 크메르 루지는 북경에 망명해 있던 시하눅의 도움으로 북경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캄보디아 내의 반 정부군으로, 미국에 의해 쫒겨났던 전 왕 시하눅을 복위 시키겠다는 명분으로 결성된 "엉까"를 흡수하여 국내 최대 무장세력이 되면서, 의기양양하게 프놈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손쉽게 논놀 정부를 전복한 것입니다.이 당시에 앞장 서 있던 지금의 훈센 총리는 나이 20살에 밀림 속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1975년 4월 16일 프놈펜 공격 도중 수류탄 파편에 의해 왼쪽눈을 실명하는 부상을 입게 됩니다.크메르 루지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공산화에 성공을 한 뒤, 공산당 특유의 의심과 불신으로 인해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고, 크메르 역사를 수 백년이나 뒤로 돌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이들이 채 3년을 못채운 상태에서 민심은 완전히 이반 되었고, 모든 지식인들을 죽이는 폭거를 저지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한 탈출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사령관으로 있던 훈센도 나이 22살에 2성 장군이 되었지만, 골수 공산주의 출신이 아닌 "엉까"출신이라는 이유로 숙청대상에 포함되자 베트남으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1978년 내내 크메르 루지 공산 정권은 베트남의 호치민과 자신들을 지원한 시하눅 전 왕간에 맺었던 호치민 루트의 밀약에 따라 공산화에 성공한 지금의 베트남 정부를 향해 60년 전에 프랑스에 의해 강제로 베트남 영토로 편입된 지금의 호치민 시 남부 지역의 메콩 델타를 돌려 달라는 요청이 묵살되자, 이제는 무력으로 찾겠다며 베트남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당시 베트남의 포로 수용소에 있으면서 베트남 정부에게 베트남 군이 아닌 포로수용소 안에 있는 캄보디아 군인 8만여명을 무장만 시켜주면 캄보디아로 우리가 올라가겠다며 탄원을 해 온 훈센과 그의 정치적 아버지라는 헹삼런은, 지금의 베트남 국가 주석이며 당시 군 총사령관이었던 "응웬" 장군에게 더더욱 적극적인 브리핑을 하게 됩니다.호치민으로 육박해 오는 크메르 루지의 군대를 소탕하기 위해 베트남이 결심을 하게 되고, 드디어 1978년 12월 24일 총 공격을 시작하여 불과 2주도 안된 1979년 1월 7일 베트남 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면서 크메르루지는 정글로 도망을 가게 되며, 베트남군을 따라 무장을 하고 들어온 포로 수용소의 캄보디아 군을 이끌던 행삼런이 국가 주석이 되고, 훈센은 28살이라는 최연소 기록을 내면서 외무부 장관이 됩니다.그런데, 이 상황에서 프놈펜의 행삼런 정권은 전국의 80%를 장악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글 속에 숨어 있는 살인마 집단, 킬링필드 학살로 100만이 넘는 동포를 살상한 크메르 루지가 UN에서 캄보디아 대표권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을 베트남에서 쫒아낸 공산 정권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정부라는 이유로 "행삼런 괴뢰 정권"으로 서방세계는 물론 대한민국에게서도 지탄을 받는 행삼런 정권과 맞선다는 명분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이러던 중 1985년에 호주,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베낭여행을 왔다가 크메르루지 공산군에게 체포 된 후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서방세계가 캄보디아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기 시작하였고, 조금씩 크메르 루지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베트남 군은 10년을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되고,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회담이 열리면서 그 직전인 1989년부터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게 됩니다.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꼭둑각시 정권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는 행삼런 정권은 32살의 훈센에게 총리직을 맡기면서 이 역시 최 연소 기록을 갱신하게 되는데, 파리평화 협정의 체결 이후 총선을 통해 1993년에 지금의 캄보디아 정부가 탄생을 하고, 시하눅은 국왕으로 재 등극을 한 것입니다.당시는 물론이고 1998년 크메르 루지의 최고 지도자 폴폿이 정글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며, 크메르 루지 반군이 정부군에 완전히 항복을 하거나 체포되기 전까지는 캄보디아는 내전 상태 그대로였으며, 치안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이고, 멀리 떨어진 나따냐끼리나 몬돌끼리 등에서는 국방부 장관의 명령이 묵살 되는 현실이었습니다.결국 베트남이 철수한 뒤에도 불안한 정정 때문에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베트남의 무력 시위가 몇번 있었고, 지속적인 훈센 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놓고 말이 많았으며, 그 중 하나가 앙코르 왓의 입장권 수입에 몇 %는 베트남 정부가 가져가는 조건으로 철군을 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돌기도 했습니다만, 미안하지만 앙코르 왓의 입장 수입은 캄보디아 정부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유네스코를 비롯한 16개의 세계 각국과 단체가 모여 만든 "압사라"라고 하는 유적보존위원회에 의해 자금의 지출이 집행됩니다.물론 캄보디아 정부가 많은 비율을 가져가기도 하지요. 베트남이 철군하면서 많은 베트남 군인들이 캄보디아에 민간인으로 정착하여 남게 되었고, 실제로 정부 요직과 국회에 진출한 사람도 굉장히 많은 상태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철군 당시만 해도 앙코르 왓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준비도 되지 않았으며, 철군이 완료된 이후 8년여가 지난 1998년부터 외국인 관광객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모든 면에서 미국 정부의 말을 듣지 않던 훈센 정권에 대한 대부분의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더구나 앙코르 왓의 입장수입을 외국 정부에 얼마를 떼어 준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