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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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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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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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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에도 세금을 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먼저, 조세제도!조세는 토지소유자에게 부과했던 세금으로 지금 현재로 따지면 자신이 소유한 재산에 부과되는재산세와 개인이나 법인이 번 소득에 대해 세금을 내는 소득세를 합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조선시대의 조세는 얼마를 냈을까? 조선시대에는 토지수확량의 10%를 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세제도는 조선시대에 전기와 후기에 따라 세금을 받는 주체가 달라지고 내는 양도달라집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과전법/직전법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이 법에 따라 조선정부의 관리들에게는 월급의 개념으로 토지를 지급 했습니다. 이 지급의 개념은 그 땅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이라는 권리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기에 조세는 그 시기의 풍흉의 정도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각각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으로 나누고, 조세를 토지 1결당 쌀을 최고 20두 최소 4두를 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조선후기에 조세제도가 변화가 됩니다. 연분9등법과 전분 6등법으로 차등해서 거두었던 조세를 풍흉이나 비옥도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쌀 4두로 고정을 시키게 되는데요. 이것을 ‘영정법’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전기에는 농민들이 세금납부를 그 토지의 수조권을 가지고 있는 관리에게 납부 했었지만조선후기에 와서는 조선의 중앙정부와 지방의 군․현에 납부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즉, 현재의 우리가 세금납부를 지방자지단체 나 중앙정부에 하는 방식이 조선시대 후기에 정착이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공납제도! 공납제도는 각 지역을 특산물을 조사하고 그 지역의 가구들에게 할당량을 주고 거둔 제도를 이야기합니다. 이 공납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는데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제도 입니다! 그리고 공납제도는 조선시대 국민들이 가장 납부하기 어려웠던 세금이라고 합니다! 왜냐고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그 지역에서 그 작물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서 거의 논농사만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다보니 그 지역 사람들은 관아에서 할당해준 특산물을 납부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구입하기도 하는 등 많은 방법을 동원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런 폐단이 계속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공납제도의 변화를 주게 됩니다. 그 변화로 시행이 된 것이 바로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그 지역에서 납부하던 토산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를 이야기 합니다.그런데 이 제도가 정착이 되었는데 몇 년이 걸렸을까요? 1608년 처음 시행하게 된 이 대동법은1708년이 되어서야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려 100년이 걸린 것이죠.. 그럼 대동법이 시행 된 상태에서 왕은 어떻게 궁에서 특산물을 먹었을까요? 그것은 궁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을 ‘공인’ 이라고 불렀답니다. 마지막으로 역제도! 조선초기에 역제도는 곡물을 내는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정기간동안 군 복부를 하거나 나라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군역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폐단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조선 정부에서는 ‘모병제’를 시행함으로서 군대를 직업화 시키고 대신 국민들에게 1년에 군포1필을 내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요, 이것을 ‘균역법’ 이라고 합니다. 결국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세금을 내는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도 세금체납자가 많듯이, 그 당시에도 세금을 체납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조선시대 정부는 세금을 체납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생각했을까요?? 요즘에도 고액 세금 체납자가 외국으로 도망을 가듯이 그 당시 국민들도 세금을 체납하거나 세금 납부가 너무 부담이 되어서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는 평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정부는 그것을 막기 위해 ‘호패법’과 ‘오가작통제’ 라는 것을 시행합니다.호패법이란, 농민들의 사회 이탈을 막고 거주지에 묶어두기 위해 만든 법으로 지금의 주민등록제도와 매우 유사합니다. 아래 그림과 같은 것을 목에 차고 다녔는데요, 우리에게 정부가 주민등록증을 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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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대 그리스에 소피스트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그리스 시대에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토론 활동, 스승 역할을 하던 집단이었습니다. 현재로 치면 교수이자 강사, 토론가가 합쳐진 느낌으로 보시면 되요. 토론 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에 반박하고 여러가지 강사 활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지식인 계층이이었습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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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관상학은 언제부터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대는 정확하게 알수가 없습니다 대략적으로 기원전 21세기 이전의 하나라의 요임금과 순임금이인재를 등용할때 관상을 활용했다는 문헌이 있다 인도 에서는 석가의 탄생과 관련된 일화도 관상법이활용된걸로 본다 관상의 기원은 이보다 더 오래 된것으로 보고 있는데 흔히 관상학의 기원을 논할때중국의 동주시대 내사(內史)벼슬을 지낸 숙복(叔服)을 시조로 삼는다동주의 숙복은 인체의 뼈를 보고 골상학을 연구해 길흉을 판단 하였고 춘추좌전에 보면 숙복이공손교의 두아들의 상을 봤는데 그의 예언이 뒷날이 그대로 맞추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숙복 이후에는 소고포자(故布子) 라는 사람이 인물이 이어받아 공자의 상을 본바 장래에 위대한 성인이될것을 예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전국시대 위나라 살았던 당거라는 사람이 그를 다라 계승해골상을 중시하는 이전의 관상학에 기색을 포함하여 학문적으로 관상학이 완성딘걸로 봅니다한나라의 고조황제 유방은 관상학에 심취해 그 학문을 우선적으로 신임하여 유방의 장인이 여공인데유방이 천자가 되기 이전인데 유방을 보고 장차 황제가 될것을 예언하고 자기의 달과 혼인을 시켰다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공은 큰뜻을 품고 군인으로 입신하여 나중에 황우를 물리치고 황제가되어한나라 세운뒤에 관상가들에거 나중에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는 기록이 있다이렇게 여공은 유방의 상을 보고 왕이 될것을 예언 하였고 또한 삼국시대의 관로가 관상가 이름을크게 날렸다 이로 인해 관상학은 이로 인해 관상학은 더 발달하였고 관상가 허부는 한신을보고상을 봐준뒤 궁중에서 세력을 잡아 부와 권세를 누렸다는허부의 인륜식감이 있다 이후 관상가겸도라는 사람이 계승하여 동방삭 외에도 많은 관상가를 배출하였고 이에 따라 한나라때에는관상학이크게 발전하여 수많은 관상가들이 이름을 남기었으며 이후 진나라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의 분서갱유라는 귀한 책들이 없어지는 일이 일어 났지만 이러한 관상법은 도제관계를 통해 극비밀리에 전해졌다덕분이 관상학이 사라지지않고 명맥을 유지 해 온것으로 알려 져 있다관상학은 이후 남북조시대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와서 여러전서를 통해 정립 되었다고 전해져달마상법으로 주 내용으로 불교를 전파시키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이후 현대 과학의 비조가 되고 잇는 마의 선인은 화산의 석실에서 살면서 겨울에도 삼베옷을 입고있어마의 선생으로 불렀고 그의 제자 진박이 마의 선생의 상학비전을 책으로 지어 "마의 상법"이라 했다집박의 호는 희이인데 송나라 태종이 그를 불러 그의 관상학에 극찬을 아끼지않고 벼슬을 주었으나다시 화산 석실로 들어가 신상전편을 출판 하였다이와같이 마의 상법과 달마상법은 오늘날 상학의 2대 상전을 이루며 그밖에 수경집 신상전편풍감원리 면상비급 등이 상서로서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중국의 관상학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된것은 7세기초 신라의 선덕여왕 때이며 당시 승려들이달마상법을 배워 고관 대작들의 상을보고 미래의 일을 점친 애기가 많은 고서로 통해 전해졌다조선 태조대왕의 왕사로 있던 무학대사는이성계가 아직 임금이 되기전에 그의 상을 보고장래의 황제가 될것임을 예언 하였고 한양의 도읍터로 잡아 주었다또한 명종때 남사고는 선조가 왕위에 오를것과 임진왜란이 닥칠것을 예언 한바 있다는 기록된 고서가있는데 고서를 보면 역대 고관대작 집에는 관상가들이 출입이 많았고 예언이 적중하여 관상이 발전하게 된것으로 본다 특히 조선 시대 초기에는 이런 예언 해준사람이 많아 관상이란 영화도 이때 일이다이런한 관상은 대개 중국에서 체계화되고 발전되어 온 만큼 우리 나라 사람의 얼굴에 그대로 적용이되어 그대로 내려 올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만 변용된 관상학을 정립하게 되면서 독자적으로발달한 관상법으로 각 얼굴 부위의치수를 재어 길흉화복을 만들수 있는관상법을 만들었고 이와 관련해조선시대 세조때 영통사의 도승이 한명희 상을 자로재어 재상이 되걸을 예측한 니야기가 전해진다동양분만 아니라 서양에서 도 관상학의 유래가 깊다서양관상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관상학이 발달 하였는데 이는 예언적 목적이 아닌 인간을분석하는 그 목적으로 주로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포틀레 마이오스에 의해 점성술과 천문학의 형태로 인식되어 과학으로 입지를 굳히고 플라톤과아리스토텔레스도 관상학에 커게 기여 햇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이며 영혼의아름다움이 외양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엿다 즉 내면의 변화를 통하여 관상이 변한다는 것이다플라톤은 젊은이들에게 내적 성숙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침마다 거울을 보라고 지시하였으며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여 관상학이란 책을 출판하여 몸은 영혼을 드러내는 표지라는믿음을 근거로 서양에서도 관상학의 뿌리가 깊다 저서로 동물지 수면중예언 관상학등이 있다이후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생김새를 유형별로 나누고 인간의 성격을 나누어 분석한 관상법이 등장하고이때부터 관상은 종교나 샤머니즘을 벗어나독자적인 관상학에 자리 잡았다아리스토텔레스은 타고나 신체가 성격을 말해주지만 이러한 성격을 관상학으로 극복할수 있다고주장하였고 본격적으로 사람과 닮은 동물의 특징을 비교하여 관상으로 해석했다이마가 좁은것은 돼지에게 보듯 멍청함을 나타내고 사각으로 균형잡힌 이마는 사자처럼 용맹하다는식으로 물형관상과 같은 관상법의 체계를 만들었다 이후 분석적 관상에서 예언적 관상학으로 다시 힘을얻게 된느데 로마 시대때 정치와 관상이 결합하여 신의 뜻을 계시하는 점성학이 관상에 영향을주어로마시대대의 대표적 관상학자인 폴레몬과 아리스텔레스의 관상학을 실생활과 연결해 길흉을 살피었고이떼 관상에서 눈이 가장 중요하다는 개념이 시작 되었다그런데 이시기에는 황제의 관상을 신격화하여 대중에게 알리기위해 서기 122년에 출간된 "황제전"에서로마의 3대황제 가이우스 카이사를 폭군으로 호감이 주지않는 외모로 묘사하엿고 반면 귀족사회에거의 알려지지않은 인물 옥타비아누스를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있다고서술하여 황제의 모습을이상적인 관상에 일치시켜 대중들에게 늘리 알렸으며 훗날 로마의 장악하고 제정 로마시대를 여는초대 황제가되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려지게 되었다이후 중세에서는 여러분야의 관상학이 결합하게 되었으며 의학 분야 에서는 체질과 결합하여건강과 질병을 나누었고 히포크라테스는 생김새와 인종의 차이는 각지역의 풍토와 기후의 영향을받으며 그영향으로 체질과 관상이 달라지고 피부색과 목소리 기질등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석했다그렇기 때문에 해가뜨는 지역의 사람들은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며 그 이유는 태양의 기운과 달의 기운그들이 적당하기 때문에 얼굴색이 다른 지역의 사람보다 더 밝으며 피부색 붉고 목소리가 곱고 기질이뛰어 나다고 해석 하였다 그때의 상황에서 그런 해석 되는 것이다그러나 중세의 성서에는 관상학과 관련 있는 부분은 하느님이 창조 한것으로 간주하여 신학을 재해석해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인간은 신의 모습을 본뜬 존재라고 믿으며 사람과 동물을 비교한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학을 비난하여 힘을 잃게되며 동물에 비유하는 관상학을 금지 시키게 되었다하지만 관살학은 점성술과 체질의학으로 더욱 발전 하였으며 관상은 여러 계층에서 친숙한 학문으로자리잡기 시작 하였으며 그리스의 의학자 갈레노스의 체술은 19세기 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네델란드의 인물학자인 에라스므스의 체상에 관상학을 더 하여 연구 하였다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몸에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타고난 운명보다 관상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인식이 생겨나며 신준상승의 활발해진 사회 분위기와 일치 하였고 이시기에는 옷 밖으로드러난 얼굴과 손에 관상의 중요한 대상으로 자리 자았으며 이때 손금을 보는 수상학이 발전하여가장 인기잇는 관상학으로 발전 하였다이후 18세기에는 과학 혁명의 영향으로 관상이 서양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는 시기가 찾아온다이시기에는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화장 가방 가면 옷등으로 몸을 가리는 시대이기 때문에 타고난관상을 풀이하는 관상학은 인기가 없어졌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본질을 중요시하는 경향이떠오르며 스위스의 신학자이자 의사인 라바트의저서 "관상학"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스위스 프랑스독일 영국에서도 출판되어 관상의 저넝시대가 다시 되었고 라바타는 생리학 해부학 동물학등 새로운과학을 총결합하여 관상학을 집대성 하였다라바타이후 19세기에서 관상학과 결합한 골상학을 출판 하였다가 쇠퇴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19세기 이후 두개골의 모양을 관찰하는 골상학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두뇌 각부위의 발달 정도두개골의 발달이 상응 한다는 믿음에따라 정립 되었으며 소설가 에드가 엘렌포는 골상학을"과학의황제" 라고 칭하기 하였으며 20세기 들어가서 골상학은 죽은 과학으로 취급 되었지만 범죄학수사학등 여러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듯 과학의 합리주의로 뭉쳐 잇는것처럼 보이는 서양도관상을 통해 타인에 대한 이해와 호기심을 충족 시키기위해 실생활과 문화처럼 뿌리깊게 자리잡고있으며 과학과 미신의 시대에 따라 그기준이 달라지는것을 이해하고 넘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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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뉴스에서 유독 한자를 많이 쓰는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보통 이름 또는 나라를 한자표기 많이 합니다.이유는 간단하고 짧게 쓰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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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계묘년 설이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ㅡ-^^-. 고부갈등 해결법 아시는분?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댁에서 본인이 일을 하면, 친정가선 남편이 더 일하면 되는것이고, 시댁에서 금전적으로 해준게 더 많다면 당연한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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