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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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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보가9 그래픽 디자인 및 영상 편집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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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음악에서 말하는 이명동음이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악보에 표기하는 음은 다르지만 건반에서는 동일한 음을 이명동음이라고 합니다^^또는 ‘이명 동음(異名同音, 딴이름 한소리)’이라고 한다. 또한 이와 같이 어떤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기보를 변경(C#을 D♭으로 바꾸는 것 등)하는 것은 '이명 동음 전환(딴이름한소리 전환)’ 또는 ‘이명 동음 변화(딴이름 한소리 변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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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판옥선이 개발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종(明宗) 때를 전후해서 왜적은 그들의 배를 개량하여 침략해오기 시작했다. 왜선의 규모는 커지고 화포를 강화하여 조선의 맹선으로 이들을 격퇴하기가 어려워졌다. 판옥선은 이러한 왜선을 무찌르기 위해 1555년(명종 10)에 만든 배이다.그 전까지 사용하던 평선(平船)인 맹선을 대신해 배 위의 네 귀에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가려 마룻대를 얹었다. 지붕을 덮어 2층 구조로 된 배에서 노를 젓는 병사들은 아래층에, 공격을 담당하는 병사들은 윗층에 배치했다. 그 결과, 서로 방해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의 승선인원은 약 125~130명 이었고 조선말에는 200명까지 탑승하였다.판옥선은 배가 높은 2층 구조로 왜구들이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이는 왜구들의 장점인 칼을 빼들고 펼치는 백병전을 전개할 수 없었으며, 판옥선의 높은 구조는 위에서 아래를 향하여 활을 쏘기에 매우 유리하고, 함포의 포좌가 높게 만들어져 명중률이 높았다. 또한 노군의 수가 증가하여 하나의 노를 5명의 노군이 저을수 있게 되어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동성과 견고함을 갖춘 판옥선은 을묘왜변(乙卯倭變)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전투선 역할을 하였고,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거북선과 더불어 많은 활약을 한 가장 규모가 컸던 전투선이었다.하지만 이때 왜구들의 침입이 줄어들자 판옥선 때문에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율곡은 이런 조정의 비판과 달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판옥선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판옥선이라는 이름은 개명되어 전선(戰船)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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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붕당정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붕당이란 요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정당'이란 말과 유사하다.정당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조선시대의 붕당도 같은 의미였다는 말이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조선 당대에 붕당이란 용어가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자들이 파쟁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붕당 간의 싸움’이란 뜻의 당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조선 왕조가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믿고 있다.조선의 당쟁은 우리의 분파적 민족성이 역사를 통하여 구체화된 형태로서, 국사와 민생은 뒷전에 밀어둔 채 당리당략을 위한 치열한 경쟁만 계속하다가 끝내는 나라마저 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 왕조 정치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망국으로 그 역사가 끝나는 만큼 이에 대한 반성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파쟁적인 민족성을 부각시켜 민족의 정치적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붕당정치의 폐단 붕당정치는 지배층의 관직 쟁탈전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당쟁과 같은 소수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인하여 많은 피비린내를 일으켰다. 더욱이 노론외척 일당에 의한 세도정치의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이로인해 민란이 빈발하였다.이처럼 붕당정치는 견제와 비판으로 집권당의 실정을 방지하였던 장점과 동시에, 폐단 또한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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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영실이 개발한 발명품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혼천의천체의 운행과 위치 그리고 적도 좌표를 관찰하는데 쓰이던 천체 관측기구로서 혼의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부른다. 1432년(세종14년) 세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정인지, 정초, 등이 고전에 의거하여 제작에 착수하였고 1433년(세종15년) 장영실, 이천에 의하여 완성되었다.2.관천대조선시대 관측 천문대로 현재 창경궁에 관천대 등 2개가 남아 있다.3.앙부일구(오목해시계)햇빛의 그림자로 시간을 재는 시계로서 일명 해시계 또는 앙부일영이라고 한다. 1334년(세종16년) 세종대왕의 명으로 장영실이 제작하여 흠경각에 처음 설치하였다.4.자격루(물시계)1434년(세종16년)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저절로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제작하였던 것이다. 이 자격루는 1536년(중종31년)개량되었으나 지금은 복잡한 자동시보장치가 없어지고 3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통만 남아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다.5.간의1276년 중국 원나라때 처음 만들어져 1437년 오늘날의 천문관측기기와 같은 원리로 개량된 천문기기로서 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으며 임진, 정유왜란으로 유실된 후 최초로 복원되었다.6.규표일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날인가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 표의 그림자 길이를 기준으로 동지, 하지, 춘분, 추분이라하고 나머지 20개 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한 것이다.7.수표1441년(세종23년)에서1442년에 걸쳐 제작, 서울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한 하천 수위 측정계이다. 세종대의 처음 수표는 나무 기둥에 자, 치, 푼의 길이를 표시하고 돌기둥 사이에 묶어 하천에 세운 반목재였으나 그 후 석재로 개량하였다.8.측우기비가 내린 양을 재는 기구로 1441년(세종23년) 발명된 세계 최초의 우량계이다. 그 이후 서울과 지방에 이를 설치하여 우량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농사에 참고케 하였다.9.풍기대바람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바람 깃발이다. 이는 우리 손으로 만든 독특한 기상관측기기의 하나이다.10.일구대암부일구(해시계)를 올려 놓은 받침대로 그 위에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12 동물로 시각을 그려 놓은 앙부일구를 제작 설치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11.일성정시의1437년(세종19년)에 이천,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기기로 밤과 낮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시계이다. 12.활자(갑인자)갑인자는 1434년(세종16년)에 왕명으로 이천 등이 제작한 동활자로 일명 "위부인자"라고하며, 현재 전해지지 않고 다만 인쇄본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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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팔만대장경은 누구에 의해 불탓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팔만대장경8만 4천여의 번뇌에 대한 법문이 새겨진 목판입니다.목판의 장수가 8만여 판에 내용또한 8만4천여개의 번뇌이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립니다.현재 정식명칭은 고려대장경판이며 국보 제32호로 해인사에 보관중입니다.또한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2. 제작시기고려시대 1237년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소망하며 만든 것 입니다. (오랑캐에 의해 불탔다가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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